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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오는 요귀의 불빛 모양으로 푸르무레 하게 허공을 비추오. 동경의 불바다는 내 마음을 더욱 음침하게 하였소. 이 때에 뒤에서, "모시모시(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소. 그것은 흰 저고리를 입은 호텔 보이였소. "왜?" 하고 나는 고개만 돌렸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하고 나는 보이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갔소. 나를 찾을 손님이 어디 있나 하고 나는 놀란 것이오. "따님께서 오셨습니다. 방으로 모셨습니다." 하고 보이는 들어가 버리고 말았소. "따님?" 하고 나는 더욱 놀랐소. 순임이가 서울서 나를 따라왔나? 그것은 안 될 말이오. 순임이가 내 뒤를 따라 떠났더라도 아무리 빨리 와도 내일이 아니면 못 왔을 것이오. 그러면 누군가. 정임인가. 정임이가 병원에서 뛰어온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소. 그것은 정임이었소. 정임은 내가 쓰다가 둔 편지를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어 안겨 버렸소. 나는 얼빠진 듯이 정임이가 하라는 대로 내버려두었소. 그 편지는 부치려고 쓴 것도 아닌데 그 편지를 정임이가 본 것이 안되었다고 생각하였소. 형! 나를 책망하시오. 심히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나는 정임을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소. 나는 몇 번이나 정임의 등을 굽어 보면서 내 팔에 힘을 넣으려고 하였소. 정임은 심히 귀여웠소. 정임이가 그처럼 나를 사모하는 것이 심히 기뻤소. 나는 감정이 재우쳐서 눈이 안 보이고 정신이 몽롱하여짐을 깨달았소. 나는 아프고 쓰린 듯한 기쁨을 깨달았소. 영어로 엑스터시라든지, 한문으로 무아의 경지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였소. 나는 사십 평생에 이러한 경험을 처음 한 것이오. 형! 형이 아시다시피 나는 내 아내 이외에 젊은 여성에게 이렇게 안겨 본 일이 없소. 물론 안아 본 일도 없소. 그러나 형! 나는 나를 눌렀소. 내 타오르는 애욕을 차디찬 이지의 입김으로 불어서 끄려고 애를 썼소. "글쎄 웬일이냐. 앓는 것이 이 밤중에 비를 맞고 왜 나온단 말이냐. 철없는 것 같으니." 하고 나는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임의 두 어깨를 붙들어 암체어에 앉혔소. 그리고 나도 테이블을 하나 세워 두고 맞은편에 앉았소. 정임은 부끄러운 듯이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제 무릎에 엎드려 울기를 시작하오. 정임은 누런 갈색의 외투를 입었소. 무엇을 타고 왔는지 모르지마는 구두에는 꽤 많이 물이 묻고 모자에는 빗방울 얼룩이 보이오. "네가 이러다가 다시 병이 더치면 어찌한단 말이냐. 아이가 왜 그렇게 철이 없니?" 하고 나는 더욱 냉정한 어조로 책망하고 데스크 위에 놓인 내 편지 초를 집어 박박 찢어 버렸소. 종이 찢는 소리에 정임은 잠깐 고개를 들어서 처음에는 내 손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소.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체하고 도로 교의에 돌아와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소. 그리고 도무지 흥분되지 아니한 모양을 꾸몄소. 형! 어떻게나 힘드는 일이오? 참으면 참을수록 내 이빨이 마주 부딪고, 얼굴의 근육은 씰룩거리고 손은 불끈불끈 쥐어지오. "정말 내일 가세요?" 하고 아마 오 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정임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소. "그럼, 가야지." 하고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소. "저도 데리고 가세요!" 하는 정임의 말은 마치 서릿발이 날리는 칼날과 같았소. 나는 깜짝 놀라서 정임을 바라보았소. 그의 눈은 빛나고 입은 꼭 다물고 얼굴의 근육은 팽팽하게 켕겼소. 정임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도는 무서운 기운이 있었소. 나는 즉각적으로 죽기를 결심한 여자의 모양이라고 생각하였소. 열정으로 불덩어리가 되었던 정임은 내가 보이는 냉랭한 태도로 말미암아 갑자기 얼어 버린 것 같았소. "어디를?" 하고 나는 정임의 `저도 데리고 가세요.' 하는 담대한 말에 놀라면서 물었소. "어디든지, 아버지 가시는 데면 어디든지 저를 데리고 가세요. 저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혼자서는 못 살 것을 지나간 반 달 동안에 잘 알았습니다. 아까 아버지 오셨다 가신 뒤에 생각해 보니깐 암만해도 아버지는 다시 저에게 와 보시지 아니하고 가실 것만 같애요. 그리고 저로 해서 아버지께서는 무슨 큰 타격을 당하신 것만 같으셔요. 처음 뵈올 적에 벌써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반드시 무슨 큰일이 나셨느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어, 저로 해서 그러신 것만 같고,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려는 것만 같고, 그래서 달려왔더니 여기 써 놓으신 편지를 보고 그 편지에 다른 말씀은 어찌 됐든지, 네 일기를 보았다 하신 말씀을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저와 한 방에 있는 애가 암만해도 어머니 스파인가봐요. 제가 입원하기 전에도 제 눈치를 슬슬 보고 또 책상 서랍도 뒤지는 눈치가 보이길래 일기책은 늘 쇠 잠그는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아마 제가 정신 없이 앓고 누웠는 동안에 제 핸드백에서 쇳대를 훔쳐 갔던가봐요. 그래서는 그 일기책을 꺼내서 서울로 보냈나봐요. 그걸루 해서 아버지께서는 불명예스러운 누명을 쓰시고 학교일도 내놓으시게 되고 집도 떠나시게 되셨나봐요. 다시는 집에 안 돌아오실 양으로 결심을 하셨나봐요. 아까 병원에서도 하시는 말씀이 모두 유언하시는 것만 같아서 퍽 의심을 가졌었는데 지금 그 쓰시던 편지를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고 웅변으로 내려 말하던 정임은 갑자기 복받치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한 번 한숨을 지우고,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절루 해서 아버지께서는 집도 잃으시고 명예도 잃으시고 사업도 잃으시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으셨으니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어린 딸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어서 아버지 발 밑에 묻힐 테야요. 제가 먼저 죽거든 제가 병이 있으니깐 물론 제가 먼저 죽지요. 죽어도 좋습니다. 병원에서 앓다가 혼자 죽는 건 싫어요. 아버지 곁에서 죽으면 아버지께서, 오 내 딸 정임아 하시고 귀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겠지요. 그리고 제 몸을 어디든지 땅에 묻으시고 `사랑하는 내 딸 정임의 무덤'이라고 패라도 손수 쓰셔서 세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임은 비쭉비쭉하다가 그만 무릎 위에 엎더져 울고 마오. 나는 다만 죽은 사람 모양으로 반쯤 눈을 감고 앉아 있었소. 가슴 속에는 정임의 곁에서 지지 않는 열정을 품으면서도 정임의 말대로 정임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으면서도 나는 이 열정의 불길을 내 입김으로 꺼 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었소. "아아, 제가 왜 났어요? 왜 하나님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어요? 아버지의 일생을 파멸시키려 난 것이지요? 제가 지금 죽어 버려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저는 죽어 버릴 터이야요. 기쁘게 죽어 버리겠습니다. 제가 여덟 살부터 오늘날까지 받은 은혜를 제 목숨 하나로 갚을 수가 있다면 저는 지금으로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다만 얼마라도 다만 하루라도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어요 다만 하루만이라도, 아버지! 제가 왜 이렇습니까, 네? 제가 어려서 이렇습니까. 미친 년이 되어서 이렇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아실 테니 말씀해 주세요. 하루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곁에서 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이야요? 제 생각이 죄야요? 왜 죄입니까? 아버지,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지 마세요, 네? `정임아, 너를 데리고 가마.' 하고 약속해 주세요, 네." 정임은 아주 담대하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오. 그 얌전한, 수삽한정임의 속에 어디 그러한 용기가 있었던가, 참 이상한 일이오. 나는 귀여운 어린 계집애 정임의 속에 엉큼한 여자가 들어앉은 것을 발견하였소. 그가 몇 가지 재료(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과 제 일기를 보았다는 것)를 종합하여 나와 저와의 새에, 또 그 때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추측하는 그 상상력도 놀랍거니와 그렇게 내 앞에서는 별로 입도 벌리지 아니하던 그가 이처럼 담대하게 제 속에 있는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해 버리는 용기를 아니 놀랄 수 없었소. 내가, 사내요 어른인 내가 도리어 정임에게 리드를 받고 놀림을 받음을 깨달았소. 그러나 정임을 위해서든지, 중년 남자의 위신을 위해서든지 나는 의지력으로, 도덕력으로, 정임을 누르고 훈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였소. "정임아." 하고 나는 비로소 입을 열어서 불렀소. 내 어성은 장중하였소. 나는 할 수 있는 위엄을 다하여 `정임아.' 하고 부른 것이오. "정임아, 네 속은 다 알았다. 네 마음 네 뜻은 그만하면 다 알았다. 네가 나를 그처럼 생각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기쁘게도 생각한다. 그러나 정임아." 하고 나는 일층 태도와 소리를 엄숙하게 하여, "네가 청하는 말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너를 친딸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죽고 조선에서 죽더라도 너는 죽어서 아니 된다. 차마 너까지는 죽이고 싶지 아니하단 말이다. 내가 어디 가서 없어져 버리면 세상은 네게 씌운 누명이 애매한 줄을 알게 될 것이 아니냐. 그리되면 너는 조선의 좋은 일꾼이 되어서 일도 많이 하고 또 사랑하는 남편을 맞아서 행복된 생활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이다. 내가 어디 가 있든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네가 잘되는 것만, 행복되게 사는 것만 바라보고 혼자 기뻐할 것이 아니냐. 네가 다 옳게 알았다. 나는 네 말대로 조선을 영원히 떠나기로 하였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렇게 된 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아니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무슨 희생을 한다고 하면 내게는 그것이 큰 기쁨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제는 세상이 싫어졌다. 더 살기가 싫어졌다. 내가 십여 년 동안 전생명을 바쳐서 교육한 학생들에게까지 배척을 받을 때에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난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것이 다 내가 부족한 때문인 줄을 잘 안다. 나는 조선을 원망한다든가, 내 동포를 원망한다든가, 그럴 생각은 없다. 원망을 한다면 나 자신의 부족을 원망할 뿐이다. 내가 원체 교육을 한다든지 남의 지도자가 된다든지 할 자격이 없음을 원망한다면 원망할까, 내가 어떻게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원망하느냐. 그러니까 인제 내게 남은 일은 나를 조선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감히 십여 년 간 교육가라고 자처해 오던 거짓되고 외람된 생활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남편 노릇도 못 하고 아버지 노릇도 못 하는 사람이 남의 스승은 어떻게 되고 지도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니까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이 조금도 슬프지 아니하고 도리어 몸이 가뜬하고 유쾌해지는 것 같다. 오직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선배요 사랑하는 동지이던 남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던 네게다가 누명을 씌우고 가는 것이다." "그게 어디 아버지 잘못입니까?" 하고 정임은 입술을 깨물었소. "모두 제가 철이 없어서 저 때문에……." 하고 정임은 몸을 떨고 울었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금 세상을 버릴 때에 무슨 기쁨이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너 하나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 하나가 나를 따라 주는 것이다. 아마 너도 나를 잘못 알고 따라 주는 것이겠지마는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처자까지도 다 나를 버릴 때에 오직 너 하나가 나를 소중히 알아 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정임아 너는 몸을 조심하여서 건강을 회복하여서 오래 잘 살고, 그리고 나를 생각해 다오." 하고 나도 울었소. 형! 내가 정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잘못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때에 이런 말을 아니 할 수 없었소.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내 진정이니까. 나도 학교 선생으로, 교장으로, 또 주제넘게 지사로의 일생을 보내노라고 마치 오직 얼음 같은 의지력만 가진 사람 모양으로 사십 평생을 살아 왔지마는 내 속에도 열정은 있었던 것이오. 다만 그 열정을 누르고 죽이고 있었을 뿐이오. 물론 나는 아마 일생에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 줄 날이 없겠지요. 만일 내가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서 자유로 달리게 한다고 하면 나는 이 경우에 정임을 안고, 내 열정으로 정임을 태워 버렸을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열정으로 탈수록 나는 내 열정의 고삐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이를 악물고 매달릴 결심을 한 것이오. 열한 시! "정임아. 인제 병원으로 가거라." 하고 나는 엄연하게 명령하였소. "내일 저를 보시고 떠나시지요?" 하고 정임은 눈물을 씻고 물었소. "그럼, J조교수도 만나고 너도 보고 떠나지." 하고 나는 거짓말을 하였소. 이 경우에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큰 죄인이 되는 것이 정임에게 대하여 정임을 위하여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오. 정임은, 무서운 직각력과 상상력을 가진 정임은 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소. 나는 차마 정임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여 외면하여 버렸소. 정임은 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체경 앞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그리고, "저는 가요." 하고 내 앞에 허리를 굽혀서 작별 인사를 하였소. "오, 가 자거라." 하고 나는 극히 범연하게 대답하였소. 나는 자리옷을 입었기 때문에 현관까지 작별할 수도 없어서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명하고 내 방에서 작별할 생각을 하였소. "내일 병원에 오세요?"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이고 낙루하였소. "오, 가마." 하고 나는 또 거짓말을 하였소.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의 거짓말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시겠지요. 설사 내가 거짓말을 한 죄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 정임을 위하여 거짓말을 아니 할 수가 없지 않소? 내가 거짓말을 아니 하면 정임은 아니 갈 것이 분명하였소. "전 가요." 하고 정임은 또 한 번 절을 하였으나 소리를 내어서 울었소. "울지 마라! 몸 상한다." 하고 나는 정임에게 대한 최후의 친절을 정임의 곁에 한 걸음 가까이 가서 어깨를 또닥또닥하여 주고, 외투를 입혀 주었소.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정임은 문을 열고 나가 버렸소. 정임의 걸어가는 소리가 차차 멀어졌소. 나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소. 창에 부딪히는 빗발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 소리가 먼 나라에서 오는 것같이 들리오. 이것이 정임이가 타고 가는 자동차 소리인가. 나는 정임을 따라가서 붙들어 오고 싶었소. 내 몸과 마음은 정임을 따라서 허공에 떠가는 것 같았소. 아아 이렇게 나는 정임을 곁에 두고 싶을까. 이렇게 내가 정임의 곁에 있고 싶을까. 그러하건마는 나는 정임을 떼어 버리고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애끓는 일이다. 기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내 도덕적 책임은 엄정하게 그렇게 명령하지 않느냐.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명령 그것은 더위가 없는 명령이다 을 털끝만치라도 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정임이가 호텔 현관까지 자동차를 타기 전에 한 번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한 번만, 잠깐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잠깐만 일 분만 아니 일 초만 한 시그마라는 극히 짧은 동안만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아니, 정임을 한 시그마 동안만 더 보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도어의 핸들에 손을 대었소. `안 된다! 옳잖다!' 하고 나는 내 소파에 돌아와서 털썩 몸을 던졌소. `최후의 순간이 아니냐. 최후의 순간에 용감히 이겨야 할 것이 아니냐. 아서라! 아서라!' 하고 나는 혼자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소. 이 때에 짜박짜박 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오. 내 가슴은 쌍방망이로 두들기는 것같이 뛰었소. `설마 정임일까.' 하면서도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소. 그 발자국 소리는 분명 내 문 밖에 와서 그쳤소. 그리고는 소리가 없었소. `내 귀의 환각인가.'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소.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소. "이에스." 하고 나는 대답하고 문을 바라보았소. 문이 열렸소. 들어오는 이는 정임이었소. "웬일이냐." 하고 나는 엄숙한 태도를 지었소. 그것으로 일 초의 일천분지 일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던 정임을 보고 기쁨을 카무플라주한 것이오. 정임은 서슴지 않고 내 뒤에 와서 내 교의에 몸을 기대며, "암만해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다시 뵈올 기약은 없는 것만 같아서 가다가 도로 왔습니다. 한 번만 더 뵙고 갈 양으로요. 그래 도로 와서도 들어올까 말까 하고 주저주저하다가 이것이 마지막인데 하고 용기를 내어서 들어왔습니다. 내일 저를 보시고 가신다는 것이 부러 하신 말씀만 같고, 마지막 뵈옵고, 뵈온대도 그래도 한 번 더 뵈옵기만 해도……." 하고 정임의 말은 끝을 아물지 못하였소. 그는 내 등 뒤에 서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소. 나는 다만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오. `정임아,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네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은 네 뒤를 따라서 허공으로 날았다. 나는 너를 한 초라도 한 초의 천분지 일 동안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정임아, 내 진정은 너를 언제든지 내 곁에 두고 싶다. 정임아, 지금 내 생명이 가진 것은 오직 너뿐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소. 그러나 이런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되오! 만일 내가 이런 말을 하여 준다면 정임이가 기뻐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정임이에게 이런 기쁨을 주어서는 아니 되오! 나는 어디까지든지 아버지의 위엄, 아버지의 냉정함을 아니 지켜서는 아니 되오. 그렇지마는 내 가슴에 타오르는 이름지을 수 없는 열정의 불길은 내 이성과 의지력을 태워 버리려 하오. 나는 눈이 아뜩아뜩함을 깨닫소. 나는 내 생명의 불길이 깜박깜박함을 깨닫소. 그렇지마는! 아아 그렇지마는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무상 명령의 발령자인 쓴 잔을 마시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산! 바위!'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이것을 염하였소. 그러나 열정의 파도가 치는 곳에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오? 바위는 흔들리지 아니하오? 태산과 반석이 그 흰 불길에 타서 재가 되지는 아니하오? 인생의 모든 힘 가운데 열정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어디 있소? 아마도 우주의 모든 힘 가운데 사람의 열정과 같이 폭력적, 불가항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뇌성, 벽력, 글쎄 그것에나 비길까. 차라리 천체와 천체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상한 속력을 가지고 마주 달려들어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큰 소리와 우리가 굳다고 일컫는 금강석이라도 증기를 만들고야 말 만한 열을 발하는 충돌의 순간에나 비길까. 형. 사람이라는 존재가 우주의 모든 존재 중에 가장 비상한 존재인 것 모양으로 사람의 열정의 힘은 우주의 모든 신비한 힘 가운데 가장 신비한 힘이 아니겠소? 대체 우주의 모든 힘은 그것이 아무리 큰 힘이라고 하더라도 저 자신을 깨뜨리는 것은 없소. 그렇지마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열정은 능히 제 생명을 깨뜨려 가루를 만들고 제 생명을 살라서 소지를 올리지 아니하오? 여보, 대체 이에서 더 폭력이요, 신비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 때 내 상태, 어깨 뒤에서 열정으로 타고 섰는 정임을 느끼는 내 상태는 바야흐로 대폭발, 대충돌을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때가 아니었소. 만일 조금만이라도 내가 내 열정의 고삐에 늦춤을 준다고 하면 무서운 대폭발이 일어났을 것이오. "정임아!" 하고 나는 충분히 마음을 진정해 가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정임의 얼굴을 찾았소. "네에." 하고 정임은 입을 약간 내 귀 가까이로 가져와서 그 씨근거리는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 들리고 그 후끈후끈하는 뜨거운 입김이 내 목과 뺨에 감각되었소. 억지로 진정하였던 내 가슴은 다시 설레기를 시작하였소. 그 불규칙한 숨소리와 뜨거운 입김 때문이었을까. "시간 늦는다. 어서 가거라. 이 아버지는 언제까지든지 너를 사랑하는 딸 로 소중히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있으마. 또 후일에 다시 만날 때도 있을지 아느냐. 설사 다시 만날 때가 없다기로니 그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냐. 나이 많은 사람은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은 오래 살아서 인생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 너는 몸이 아직 약하니 마음을 잘 안정해서 어서 건강을 회복하여라. 그리고 굳세게 굳세게, 힘있게 힘있게 살아 다오. 조선은 사람을 구한다. 나 같은 사람은 인제 조선서 더 일할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마는 네야 어떠냐. 설사 누가 무슨 말을 해서 학교에서 학비를 아니 준다거든 내가 네게 준 재산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공부를 하려무나. 네가 그렇게 해 주어야 나를 위하는 것이다. 자 인제 가거라. 네 앞길이 양양하지 아니하냐. 자 인제 가거라. 나는 내일 아침 동경을 떠날란다. 자 어서." 하고 나는 화평하게 웃는 낯으로 일어섰소. 정임은 울먹울먹하고 고개를 숙이오. 밖에서는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소리를 하고 유리창을 흔드오. "그럼, 전 가요." 하고 정임은 고개를 들었소. "그래. 어서 가거라. 벌써 열한시 반이다. 병원 문은 아니 닫니!" 정임은 대답이 없소. "어서!" 하고 나는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일렀소. "갈랍니다."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여서 내게 인사를 하고 문을 향하여 한 걸음 걷다가 잠깐 주저하더니, 다시 돌아서서, "저를 한 번만 안아 주셔요. 아버지가 어린 딸을 안듯이 한 번만 안아 주셔요." 하고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서오. 나는 팔을 벌려 주었소. 정임은 내 가슴을 향하고 몸을 던졌소. 그리고 제 이뺨 저뺨을 내 가슴에 대고 비볐소. 나는 두 팔을 정임의 어깨 위에 가벼이 놓았소. 이러한 지 몇 분이 지났소. 아마 일 분도 다 못 되었는지 모르오. 정임은 내 가슴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지게 우러러보더니, 다시 내 가슴에 낯을 대더니 아마 내 심장이 무섭게 뛰는 소리를 정임은 들었을 것이오 정임은 다시 고개를 들고, "어디를 가시든지 편지나 주셔요." 하고 굵은 눈물을 떨구고는 내게서 물러서서 또 한 번 절하고, "안녕히 가셔요. 만주든지 아령이든지 조선 사람 많이 사는 곳에 가셔서 일하고 사셔요.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제가, 아버지 말씀대로 혼자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도 제 말씀대로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네, 그렇다고 대답하셔요!" 하고는 또 한 번 내 가슴에 몸을 기대오. 죽기를 결심한 나는 `오냐, 그러마.' 하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소. 그래서, "오, 내 살도록 힘쓰마." 하는 약속을 주어서 정임을 돌려보냈소. 정임의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게 된 때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옥상 정원으로 나갔소. 비가 막 뿌리오. 나는 정임이가 타고 나가는 자동차라도 볼 양으로 호텔 현관 앞이 보이는 꼭대기로 올라갔소. 현관을 떠난 자동차 하나가 전찻길로 나서서는 북을 향하고 달아나서 순식간에 그 꽁무니에 달린 붉은 불조차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나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정임아, 정임아!" 하고 수없이 불렀소. 나는 사 층이나 되는 이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정임이가 타고 간 자동차의 뒤를 따르고 싶었소. "아아 영원한 인생의 이별!" 나는 그 옥상에 얼마나 오래 섰던지를 모르오. 내 머리와 낯과 배스로브에서는 물이 흐르오. 방에 들어오니 정임이가 끼치고 간 향기와 추억만 남았소. 나는 방 안 구석구석에 정임의 모양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소. 특별히 정임이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내 교의 뒤에는 분명히 갈색 외투를 입은 정임의 모양이 완연하오. "정임아!" 하고 나는 그 곳으로 따라가오. 그러나 가면 거기는 정임은 없소. 나는 교의에 앉소. 그러면 정임의 씨근씨근하는 숨소리와 더운 입김이 분명 내 오른편에 감각이 되오. 아아 무서운 환각이여! 나는 자리에 눕소. 그리고 정임의 환각을 피하려고 불을 끄오. 그러면 정임이가 내게 안기던 자리쯤에 환하게 정임의 모양이 나타나오. 나는 불을 켜오. 또 불을 끄오. 날이 밝자 나는 비가 갠 것을 다행으로 비행장에 달려가서 비행기를 얻어 탔소. 나는 다시 조선의 하늘을 통과하기가 싫어서 북강에서 비행기에서 내려서 문사에 와서 대련으로 가는 배를 탔소. 나는 대련에서 내려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는 곧 장춘 가는 급행을 탔소. 물론 아무에게도 엽서 한 장 한 일 없었소. 그것은 인연을 끊은 세상에 대하여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까닭이오. 차가 옛날에는 우리 조상네가 살고 문화를 짓던 옛 터전인 만주의 벌판을 달릴 때에는 감회도 없지 아니하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한가한 감상을 쓸 겨를이 없소. 내가 믿고 가는 곳은 하얼빈에 있는 어떤 친구요. 그는 R라는 사람으로서 경술년에 A씨 등의 망명객을 따라 나갔다가 아라사에서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아라사 사관으로서 구주 대전에도 출정을 하였다가, 혁명 후에도 이내 적위군에 머물러서 지금까지 소비에트 장교로 있는 사람이오. 지금은 육군 소장이라던가. 나는 하얼빈에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오. 그 사람을 찾아야 아라사에 들어갈 여행권을 얻을 것이요, 여행권을 얻어야 내가 평소에 이상하게도 그리워하던 바이칼 호를 볼 것이오. 하얼빈에 내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소. 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쏜 곳이 어딘가 하고 벌판과 같이 넓은 플랫폼에 내렸소. 과연 국제 도시라 서양 사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각기 제 말로 지껄이오. 아아 조선 사람도 있을 것이오마는 다들 양복을 입거나 청복을 입거나 하고 또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말도 잘 하지 아니하여 아무쪼록 조선 사람인 것을 표시하지 아니하는 판이라 그 골격과 표정을 살피기 전에는 어느 것이 조선 사람인지 알 길이 없소. 아마 허름하게 차리고 기운 없이, 비창한 빛을 띠고 사람의 눈을 슬슬 피하는 저 순하게 생긴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겠지요. 언제나 한 번 가는 곳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나는 조선 사람이오!' 하고 뽐내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면 눈물이 나오. 더구나, 하얼빈과 같은 각색 인종이 모여서 생존 경쟁을 하는 마당에 서서 이런 비감이 간절하오. 아아 이 불쌍한 유랑의 무리 중에 나도 하나를 더 보태는가 하면 눈물을 씻지 아니할 수 없었소. 나는 역에서 나와서 어떤 아라사 병정 하나를 붙들고 R의 아라사 이름을 불렀소. 그리고 아느냐고 영어로 물었소. 그 병정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또는 R를 모르는지 무엇이라고 아라사말로 지껄이는 모양이나 나는 물론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그러나 나는 그 병정의 표정에서 내게 호의를 가진 것을 짐작하고 한 번 더 분명히, "요십 알렉산드로비치 리가이." 라고 불러 보았소. 그 병정은 빙그레 웃고 고개를 흔드오. 이 두 외국 사람의 이상한 교섭에 흥미를 가지고 여러 아라사 병정과 동양 사람들이 십여 인이나 우리 주위에 모여드오. 그 병정이 나를 바라보고 또 한 번 그 이름을 불러 보라는 모양 같기로 나는 이번에는 R의 아라사 이름에 `제너럴'이라는 말을 붙여 불러 보았소. 그랬더니 어떤 다른 병정이 뛰어들며, "게네라우 리가이!" 하고 안다는 표정을 하오. `게네라우'라는 것이 아마 아라사말로 장군이란 말인가 하였소. "예스. 예스." 하고 나는 기쁘게 대답하였소. 그리고는 아라사 병정들끼리 무에라고 지껄이더니, 그 중에 한 병정이 나서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제가 마차 하나를 불러서 나를 태우고 저도 타고 어디로 달려가오. 그 아라사 병정은 친절히 알지도 못하는 말로 이것저것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줄을 생각하고 내 어깨를 툭 치고 웃소. 어린애와 같이 순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나는 고맙다는 표로 고개만 끄덕끄덕하였소.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서양 시가로 달려가다가 어떤 큰 저택 앞에 이르러서 마차를 그 현관 앞으로 들이몰았소. 현관에서는 종졸이 나왔소. 내가 명함을 들여보냈더니 부관인 듯한 아라사 장교가 나와서 나를 으리으리한 응접실로 인도하였소. 얼마 있노라니 중년이 넘은 어떤 대장이 나오는데 군복에 칼끈만 늘였소. "이게 누구요." 하고 그 대장은 달려들어서 나를 껴안았소. 이십오 년 만에 만나는 우리는 서로 알아본 것이오. 이윽고 나는 그의 부인과 자녀들도 만났소. 그들은 다 아라사 사람이오. 저녁이 끝난 뒤에 나는 R의 부인과 딸의 음악과 그림 구경과 기타의 관대를 받고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소. 경술년 당시 이야기도 나오고, A씨의 이야기도 나오고, R의 신세 타령도 나오고, 내 이십오 년 간의 생활 이야기도 나오고, 소비에트 혁명 이야기도 나오고, 하얼빈 이야기도 나오고, 우리네가 어려서 서로 사귀던 회구담도 나오고 이야기가 그칠 바를 몰랐소. "조선은 그립지 않은가." 하는 내 말에 쾌활하던 R는 고개를 숙이고 추연한 빛을 보였소. 나는 R의 추연한 태도를 아마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만 여겼소. 그래서 나는 그리 침음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고국이 그립겠나. 나는 고국을 떠난 지가 일 주일도 안 되건마는 못 견디게 그리운데." 하고 동정하는 말을 하였소. 했더니, 이 말 보시오. 그는 침음을 깨뜨리고 고개를 번쩍 들며, "아니! 나는 고국이 조금도 그립지 아니하이. 내가 지금 생각한 것은 자네 말을 듣고 고국이 그리운가 그리워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 것일세. 그랬더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어. 그야 어려서 자라날 때에 보던 강산이라든지 내 기억에 남은 아는 사람들이라든지, 보고 싶다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지마는 그것이 고국이 그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 밖에는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고국이 그리운 것을 찾을 길이 없네. 나도 지금 자네를 보고 또 자네 말을 듣고 오래 잊어버렸던 고국을 좀 그립게, 그립다 하게 생각하려고 해 보았지마는 도무지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나지 않네." 이 말에 나는 깜짝 놀랐소. 몸서리치게 무서웠소. 나는 해외에 오래 표랑하는 사람은 으레 고국을 그리워할 것으로 믿고 있었소. 그런데 이 사람이, 일찍은 고국을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려던 이 사람이 도무지 이처럼 고국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놀라운 정도를 지나서 괘씸하기 그지없었소. 나도 비록 조선을 떠난다고, 영원히 버린다고 나서기는 했지마는 나로는 죽기 전에는 아니 비록 죽더라도 잊어버리지 못할 고국을 잊어버린 R의 심사가 난측하고 원망스러웠소. "고국이 그립지가 않아?" 하고 R에게 묻는 내 어성에는 격분한 빛이 있었소.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고국에 무슨 그리울 것이 있단 말인가. 그 빈대 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 나무 한 개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 물보다도 모래가 많은 다 늙어빠진 개천이 그립단 말인가. 그 무기력하고 가난한, 시기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그리워할 음악이 있단 말인가, 미술이 있단 말인가, 문학이 있단 말인가, 사상이 있단 말인가, 사모할 만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날더러 고국의 무엇을 그리워하란 말인가. 나는 조국이 없는 사람일세. 내가 소비에트 군인으로 있으니 소비에트가 내 조국이겠지. 그러나 진심으로 내 조국이라는 생각은 나지 아니하네." 하고 저녁 먹을 때에 약간 붉었던 R의 얼굴은 이상한 흥분으로 더욱 붉어지오.유 정유 정 R는 먹던 담배를 화나는 듯이 재떨이에 집어던지며, "내가 하얼빈에 온 지가 인제 겨우 삼사 년밖에 안 되지마는 조선 사람 때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와서 달라는 것도 달라는 것이지마는 조선 사람이 또 어찌하였느니 또 어찌하였느니 하는 불명예한 말을 들을 때에는 나는 금시에 죽어 버리고 싶단 말일세. 내게 가장 불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고국이라는 기억과 조선 사람의 존잴세. 내가 만일 어느 나라의 독재자가 된다고 하면 나는 첫째로 조선인 입국 금지를 단행하려네. 만일 조선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약이 있다고 하면 나는 생명과 바꾸어서라도 사 먹고 싶어." 하고 R는 약간 흥분된 어조를 늦추어서, "나도 모스크바에 있다가 처음 원동에 나왔을 적에는 길을 다녀도 혹시 동포가 눈에 뜨이지나 아니하나 하고 찾았네. 그래서 어디서든지 동포를 만나면 반가이 손을 잡았지. 했지만 점점 그들은 오직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단 말일세. 인제는 조선 사람이라고만 하면 만나기가 무섭고 끔찍끔찍하고 진저리가 나는 걸 어떡허나. 자네 명함이 들어온 때에도 조선 사람인가 하고 가슴이 뜨끔했네." 하고 R는 웃지도 아니하오. 그의 얼굴에는, 군인다운 기운찬 얼굴에는 증오와 분노의 빛이 넘쳤소. "나도 자네 집에 환영받는 나그네는 아닐세그려." 하고 나는 이 견디기 어려운 불쾌하고 무서운 공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농담삼아 한 마디를 던지고 웃었소. 나는 R의 말이 과격함에 놀랐지마는, 또 생각하면 R가 한 말 가운데는 들을 만한 이유도 없지 아니하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R를 괘씸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버린다는 조선을 위하여서 가슴이 아팠소. 그렇지만 이제 나 따위가 가슴을 아파한대야 무슨 소용이 있소. 조선에 남아 계신 형이나 R의 말을 참고삼아 쓰시기 바라오. 어쨌으나 나는 R에게서 목적한 여행권을 얻었소. R에게는 다만, `나는 피곤한 몸을 좀 정양하고 싶다. 나는 내가 평소에 즐겨하는 바이칼 호반에서 눈과 얼음의 한겨울을 지내고 싶다.' 는 것을 여행의 이유로 삼았소. R는 나의 초췌한 모양을 짐작하고 내 핑계를 그럴듯하게 아는 모양이었소. 그리고 나더러, `이왕 정양하려거든 카프카 지방으로 가거라. 거기는 기후 풍경도 좋고 또 요양원의 설비도 있다.'는 것을 말하였소. 나도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기타의 여행기 등속에서 이 지방에 관한 말을 못 들은 것이 아니나 지금 내 처지에는 그런 따뜻하고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릴 여유도 없고 또 그러한 지방보다도 눈과 얼음과 바람의 시베리아의 겨울이 합당한 듯하였소. 그러나 나는 R의 호의를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어서 그가 써 주는 대로 소개장을 다 받아 넣었소. 그는 나를 처남 매부 간이라고 소개해 주었소. 나는 모스크바 가는 다음 급행을 기다리는 사흘 동안 R의 집의 손이 되어서 R부처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소. 그 후에는 나는 R와 조선에 관한 토론을 한 일은 없지마는 R가 이름지어 말을 할 때에는 조선을 잊었노라, 그리워할 것이 없노라, 하지마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조선을 못 잊고 또 조선을 여러 점으로 그리워하는 양을 보았소. 나는 그것으로써 만족하게 여겼소. 나는 금요일 오후 세시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하얼빈을 떠났소. 역두에는 R와 R의 가족이 나와서 꽃과 과일과 여러 가지 선물로 나를 전송하였소. R와 R의 가족은 나를 정말 형제의 예로 대우하여 차가 떠나려 할 때에 포옹과 키스로 작별하여 주었소. 이 날은 퍽 따뜻하고 일기가 좋은 날이었소. 하늘에 구름 한 점, 땅에 바람 한 점 없이 마치 늦은 봄날과 같이 따뜻한 날이었소. 차는 떠났소. 판다는 둥 안 판다는 둥 말썽 많은 동중로(지금은 북만 철로라고 하오.)의 국제 열차에 몸을 의탁한 것이오. 송화강(松花江:쑹화 강)의 철교를 건너오. 아아 그리도 낯익은 송화강! 송화강이 왜 낯이 익소. 이 송화강은 불함산(장백산)에 근원을 발하여 광막한 북만주의 사람도 없는 벌판을 혼자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내 신세와 같소. 이 북만주의 벌판을 만든 자가 송화강이지마는 나는 그만한 힘이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오. 이 광막한 북만의 벌판을 내 손으로 개척하여서 조선 사람의 낙원을 만들자 하고 뽐내어 볼까. 그것은 형이 하시오. 내 어린것이 자라거든 그놈에게나 그러한 생각을 넣어 주시오. 동양의 국제적 괴물인 하얼빈 시가도 까맣게 안개에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그러나 그 시가를 싼 까만 기운이 국제적 풍운을 포장한 것이라고 할까요. 가도가도 벌판. 서리맞은 마른 풀바다. 실개천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서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 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기쁨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오. 이 곳에도 산도 있고 냇물도 있고 삼림도 있고 꽃도 피고 날짐승, 길짐승이 날고 기던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던 것이 몇만 년 지나는 동안에 산은 낮아지고 골은 높아져서 마침내 이 꼴이 된 것인가 하오. 만일 큰 힘이 있어 이 광야를 파낸다 하면 물 흐르고 고기 놀던 강과, 울고 웃던 생물이 살던 자취가 있을 것이오. 아아 이 모든 기억을 꽉 품고 죽은 듯이 잠잠한 광야에! 내가 탄 차가 F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북만주 광야의 석양의 아름다움은 그 극도에 달한 것 같았소. 둥긋한 지평선 위에 거의 걸린 커다란 해! 아마 그 신비하고 장엄함이 내 경험으로는 이 곳에서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생각하오. 이글이글 이글이글 그러면서도 둥글다는 체모를 변치 아니하는 그 지는 해! 게다가 먼 지평선으로부터 기어드는 황혼은 인제는 대지를 거의 다 덮어 버려서 마른 풀로 된 지면은 가뭇가뭇한 빛을 띠고 사막의 가는 모래를 머금은 지는 해의 광선을 반사하여서 대기는 짙은 자줏빛을 바탕으로 한 가지각색의 명암을 가진, 오색이 영롱한, 도무지 내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한 색채의 세계를 이루었소. 아 좋다! 그 속에 수은같이 빛나는, 수없는 작고 큰 호수들의 빛! 그 속으로 날아오는 수없고 이름 모를 새들의 떼도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렸소. 거의 떠날 시간이 다 되어서 짐의 일부분은 미처 가지지도 못하고 뛰어내렸소. 반쯤 미친 것이오. 정거장 앞 조그마한 아라사 사람의 여관에다가 짐을 맡겨 버리고 나는 단장을 끌고 철도 선로를 뛰어 건너서 호수의 수은빛 나는 곳을 찾아서 지향 없이 걸었소. 한 호수를 가서 보면 또 저 편 호수가 더 아름다워 보이오. 원컨대 저 지는 해가 다 지기 전에 이 광야에 있는 호수를 다 돌아보고 싶소. 내가 호숫 가에 섰을 때에 그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면에 비치는 내 그림자의 외로움이여, 그러나 아름다움이여! 그 호수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를 품고 하늘이 오면 하늘을, 새가 오면 새를, 구름이 오면 구름을, 그리고 내가 오면 나를 비추지 아니하오. 나는 호수가 되고 싶소. 그러나 형! 나는 이 호수면에서 얼마나 정임의 얼굴을 찾았겠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동경의 병실에 누워 있는 정임의 모양이 몽고 사막의 호수면에 비칠 리야 있겠소. 없겠지마는 나는 호수마다 정임의 그림자를 찾았소. 그러나 보이는 것은 외로운 내 그림자뿐이오. `가자. 끝없는 사막으로 한없이 가자. 가다가 내 기운이 진하는 자리에 나는 내 손으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내 몸을 묻고 죽어 버리자.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는 정임의 「이데아」를 안고 이 깨끗한 광야에서 죽어 버리 자.' 하고 나는 지는 해를 향하고 한정 없이 걸었소. 사막이 받았던 따뜻한 기운은 아직도 다 식지는 아니하였소. 사막에는 바람 한 점도 없소. 소리 하나도 없소. 발자국 밑에서 우는 마른 풀과 모래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오. 나는 허리를 지평선에 걸었소. 그 신비한 광선은 내 가슴으로부터 위에만을 비추고 있소. 문득 나는 해를 따라가는 별 두 개를 보았소. 하나는 앞을 서고 하나는 뒤를 섰소. 앞의 별은 좀 크고 뒤의 별은 좀 작소. 이런 별들은 산 많은 나라 다시 말하면 서쪽 지평선을 보기 어려운 나라에서만 생장한 나로서는 보지 못하던 별이오. 나는 그 별의 이름을 모르오. `두 별'이오. 해가 지평선에서 뚝 떨어지자 대기의 자줏빛은 남빛으로 변하였소. 오직 해가 금시 들어간 자리에만 주홍빛의 여광이 있을 뿐이오. 내 눈앞에서는 남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였소. 앞에 보이는 호수만이 유난히 빛나오. 또 한 떼의 이름 모를 새들이 수면을 스치며 날 저문 것을 놀라는 듯이 어지러이 날아 지나가오. 그들은 소리도 아니 하오. 날개치는 소리도 아니 들리오. 그것들은 사막의 황혼의 허깨비인 것 같소. 나는 자꾸 걷소. 해를 따르던 나는 두 별을 따라서 자꾸 걷소. 별들은 진 해를 따라서 바삐 걷는 것도 같고, 헤매는 나를 어떤 나라로 끄는 것도 같소. 아니 두 별 중에 앞선 별이 한 번 반짝하고는 최후로 한 번 반짝하고는 지평선 밑에 숨어 버리고 마오. 뒤에 남은 외별의 외로움이여! 나는 울고 싶었소. 그러나 나는 하나만 남은 작은 별 외로운 작은 별을 따라서 더 빨리 걸음을 걸었소. 그 한 별마저 넘어가 버리면 나는 어찌하오. 내가 웬일이오. 나는 시인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오. 나는 정으로 행동한 일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오. 그러나 형! 이 때에 미친 것이 아니요, 내 가슴에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따를 요샛말로 이른바 동경으로 찼소. `아아 저 작은 별!' 그것도 지평선에 닿았소. `아아 저 작은 별. 저것마저 넘어가면 나는 어찌하나.' 인제는 어둡소. 광야의 황혼은 명색뿐이요, 순식간이요, 해지자 신비하다고 할 만한 극히 짧은 동안에 아름다운 황혼을 조금 보이고는 곧 칠과 같은 암흑이오. 호수의 물만이 어디서 은빛을 받았는지 뿌옇게 나만이 유일한 존재다, 나만이 유일한 빛이다 하는 듯이 인제는 수은빛이 아니라 남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오. 나는 그 중 빛을 많이 받은, 그 중 환해 보이는 호수면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좀더 맑은 호수면을 찾는 동안에 이 광야의 어둠은 더욱더욱 짙어지오. 나는 어떤 조그마한 호숫 가에 펄썩 앉았소. 내 앞에는 짙은 남빛의 수면에 조그마한 거울만한 밝은 데가 있소. 마치 내 눈에서 무슨 빛이 나와서, 아마 정임을 그리워하는 빛이 나와서 그 수면에 반사하는 듯이. 나는 허겁지겁 그 빤한 수면을 들여다보았소. 혹시나 정임의 모양이 거기 나타나지나 아니할까 하고. 세상에는 그러한 기적도 있지 아니한가 하고. 물에는 정임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소. 이따금 정임의 눈도 어른거리고 코도 번뜻거리고 입도 번뜻거리는 것 같소. 그러나 수면은 점점 어두워 가서 그 환영조차 더욱 희미해지오. 나는 호수면에 빤하던 한 조각조차 캄캄해지는 것을 보고 숨이 막힐 듯함을 깨달으면서 고개를 들었소. 고개를 들려고 할 때에, 형이여, 이상한 일도 다 있소. 그 수면에 정임의 모양이, 얼굴만 아니라, 그 몸 온통이 그 어깨, 가슴, 팔, 다리까지도, 그 눈과 입까지도, 그 얼굴의 흰 것과 입술이 불그레한 것까지도, 마치 환한 대낮에 실물을 대한 모양으로 소상하게 나타났소. "정임이!" 하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물로 뛰어들려 하였소. 그러나 형, 그 순간에 정임의 모양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나는 이 어둠 속에 어디 정임이가 나를 따라온 것같이 생각했소. 혹시나 정임이가 죽어서 그 몸은 동경의 대학 병원에 벗어 내어던지고 혼이 빠져 나와서 물에 비치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가슴이 울렁거림을 진정치 못하면서 호숫 가에서 벌떡 일어나서 어둠 속에 정임을 만져보려는 듯이, 어두워서 눈에 보지는 못하더라도 자꾸 헤매노라면 몸에 부딪히기라도 할 것 같아서 함부로 헤매었소. 그리고는 눈앞에 번뜻거리는 정임의 환영을 팔을 벌려서 안고 소리를 내어서 불렀소. "정임이, 정임이." 하고 나는 수없이 정임을 부르면서 헤매었소. 그러나 형, 이것도 죄지요. 이것도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이지요. 그러길래 광야에 아주 어둠이 덮이고 새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하게 나고는 영 정임의 헛그림자조차 아니 보이지요. 나는 죄를 피해서 정임을 떠나서 멀리 온 것이니 정임의 헛그림자를 따라다니는 것도 옳지 않지요.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혼자서 정임을 생각만 하는 것이야 무슨 죄 될 것이 있을까요. 내가 정임을 만 리나 떠나서 이렇게 헛그림자나 그리며 그리워하는 것이야 무슨 죄가 될까요. 설사 죄가 되기로서니 낸들 이것까지야 어찌하오. 내가 내 혼을 죽여 버리기 전에야 내 힘으로 어찌하오. 설사 죄가 되어서 내가 지옥의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기로서니 그것을 어찌하오. 형, 이것, 이것도 말아야 옳은가요. 정임의 헛그림자까지도 끊어 버려야 옳은가요. 이 때요. 바로 이 때요. 내 앞 수십 보나 될까(캄캄한 밤이라 먼지 가까운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마는) 하는 곳에 난데없는 등불 하나가 나서오. 나는 깜짝 놀라서 우뚝 섰소. 이 무인지경, 이 밤중에 갑자기 보이는 등불 그것은 마치 이 세상 같지 아니하였소. 저 등불이 어떤 등불일까, 그 등불이 몇 걸음 가까이 오니, 그 등불 뒤에 사람의 다리가 보이오. "누구요?" 하는 것은 귀에 익은 조선말이오. 어떻게 이 몽고의 광야에서 조선말을 들을까 하고 나는 등불을 처음 볼 때보다 더욱 놀랐소.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오." 하고 나도 등불을 향하여 마주 걸어갔소. 그 사람은 등불을 들어서 내 얼굴을 비추어 보더니, "당신 조선 사람이오?" 하고 묻소. "네, 나는 조선 사람이오. 당신도 음성을 들으니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광야에, 아닌 밤중에, 여기 계시단 말이오." 하고 나는 놀라는 표정 그대로 대답하였소. "나는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니까 여기 오는 것도 있을 일이지마는 당신이야말로 이 아닌 밤중에." 하고 육혈포를 집어넣고, 손을 내밀어서 내게 악수를 구하오. 나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소. 그러나 나는 `죽을 지경에 어떻게 오셨단 말이오.' 하고, 그가 내가 무슨 악의를 가진 흉한이 아닌 줄을 알고 손에 빼어들었던 육혈포로 시기를 잠깐이라도 노린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던 것이오. 그도 내 이름도 묻지 아니하고 또 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아니하고 나는 그에게 끌려서 그가 인도하는 곳으로 갔소. 그 곳이란 것은 아까 등불이 처음 나타나던 곳인 듯한데, 거기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어떤 부인이 있는 것이오. 남자는 아라사식 양복을 입었으나 부인은 중국 옷 비슷한 옷을 입었소. 남자는 나를 끌어서 그 부인에게 인사하게 하고, "이는 내 아내요." 하고 또 그 아내라는 부인에게는, "이 이는 조선 양반이오. 성함이 뉘시죠?" 하고 그는 나를 바라보오. 나는, "최석입니다." 하고 바로 대답하였소. "최석 씨?" 하고 그 남자는 소개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오. "네, 최석입니다." "아 ●●학교 교장으로 계신 최석 씨." 하고 그 남자는 더욱 놀라오. "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세요?" 하고 나도 그가 혹시 아는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등불 빛에 얼굴을 들여다 보았으나 도무지 그 얼굴이 본 기억이 없소. "최 선생을 내가 압니다. 남 선생한테 말씀을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남 선생도 돌아가신 지가 벌써 몇 핸가."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그 아내를 돌아보오. "십오 년이지요." 하고 곁에 섰던 부인이 말하오. "벌써 십오 년인가." 하고 그 남자는 나를 보고, "정임이 잘 자랍니까? 벌써 이십이 넘었지." 하고 또 부인을 돌아보오. "스물세 살이지." 하고 부인이 확실치 아니한 듯이 대답하오. "네, 스물세 살입니다. 지금 동경에 있습니다. 병이 나서 입원한 것을 보고 왔는데." 하고 나는 번개같이 정임의 병실과 정임의 호텔 장면 등을 생각하고 가슴이 설렘을 깨달았소. 의외인 곳에서 의외인 사람들을 만나서 정임의 말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소. "무슨 병입니까. 정임이가 본래 몸이 약해서." 하고 부인이 직접 내게 묻소. "네. 몸이 좀 약합니다. 병이 좀 나은 것을 보고 떠났습니다마는 염려가 됩니다." 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동경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소. 마치 고개를 동으로 돌리면 정임이가 보이기나 할 것같이. "자,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고 나는 아직 그의 성명도 모르는 남자는, 그의 아내를 재촉하더니, "우리가 조선 동포를 만난 것이 십여 년 만이오. 그런데 최 선생, 이것을 좀 보시고 가시지요." 하고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서너 걸음 끌고 가오. 거기는 조그마한 무덤이 있고 그 앞에는 석 자 높이나 되는 목패를 세웠는데 그 목패에는 `두 별 무덤'이라는 넉 자를 썼소. 내가 이상한 눈으로 그 무덤과 목패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이게 무슨 무덤인지 아십니까?" 하고 유쾌하게 묻소. "두 별 무덤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하고 나도 그의 유쾌한 표정에 전염이 되어서 웃고 물었소. "이것은 우리 둘의 무덤이외다." 하고 그는 아내의 어깨를 치며 유쾌하게 웃었소. 부인은 부끄러운 듯이 웃고 고개를 숙이오. 도무지 모두 꿈 같고 환영 같소. "자 갑시다. 자세한 말은 우리 집에 가서 합시다." 하고 서너 걸음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니 거기는 말을 세 필이나 맨 마차가 있소. 몽고 사람들이 가족을 싣고 수초를 따라 돌아다니는 그러한 마차요. 삿자리로 홍예형의 지붕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앉게 되었소. 그의 부인과 나와는 이 지붕 속에 들어앉고 그는 손수 어자대에 앉아서 입으로 쮸쮸쮸쮸 하고 말을 모오. 등불도 꺼 버리고 캄캄한 속으로 달리오. "불이 있으면 군대에서 의심을 하지요. 도적놈이 엿보지요. 게다가 불이 있으면 도리어 앞이 안 보인단 말요. 쯧쯧쯧쯧!" 하는 소리가 들리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사람인가. 또 이 부인은 무슨 사람인가 하고 나는 어두운 속에서 혼자 생각하였소. 다만 잠시 본 인상으로 보아서 그들은 행복된 부부인 것 같았소. 그들이 무엇 하러 이 아닌 밤중에 광야에 나왔던가. 또 그 이상야릇한 두 별 무덤이란 무엇인가. 나는 불현듯 집을 생각하였소. 내 아내와 어린것들을 생각하였소. 가정과 사회에서 쫓겨난 내가 아니오. 쫓겨난 자의 생각은 언제나 슬픔뿐이었소. 나는 내 아내를 원망치 아니하오. 그는 결코 악한 여자가 아니오. 다만 보통 여자요. 그는 질투 때문에 이성의 힘을 잃은 것이오. 여자가 질투 때문에 이성을 잃는 것이 천직이 아닐까요. 그가 나를 사랑하길래 나를 위해서 질투를 가지는 것이 아니오. 설사 질투가 그로 하여금 칼을 들어 내 가슴을 찌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눈을 감을 것이오. 사랑하는 자는 질투한다고 하오. 질투를 누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마는 질투에 타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덜크럭덜크럭 하고 차바퀴가 철로길을 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마차는 섰소. 앞에 빨갛게 불이 비치오. "자 이게 우리 집이오." 하고 그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양이 보이오. 내려 보니까 달이 올라오오. 굉장히 큰 달이, 붉은 달이 지평선으로서 넘석하고 올라오오. 달빛에 비추인 바를 보면 네모나게 담 담이라기보다는 성을 둘러쌓은 달 뜨는 곳으로 열린 대문을 들어서서 넓은 마당에 내린 것을 발견하였소. "아버지!" "엄마!" 하고 아이들이 뛰어나오오. 말만큼이나 큰 개가 네 놈이나 꼬리를 치고 나오오. 그놈들이 주인집 마차 소리를 알아듣고 짖지 아니한 모양이오. 큰 아이는 계집애로 여남은 살, 작은 아이는 사내로 육칠 세, 모두 중국 옷을 입었소.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소. 방은 아라사식 절반, 중국식 절반으로 세간이 놓여 있고 벽에는 조선 지도와 단군의 초상이 걸려 있소. 그들 부처는 지도와 단군 초상 앞에 허리를 굽혀 배례하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하였소. 그는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하오. "우리는 자식들을 이 흥안령 가까운 무변 광야에서 기르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지요. 조선 사람들은 하도 마음이 작아서 걱정이니 이런 호호탕탕한 넓은 벌판에서 길러나면 마음이 좀 커질까 하지요. 또 흥안령 밑에서 지나 중원을 통일한 제왕이 많이 났으니 혹시나 그 정기가 남아 있을까 하지요. 우리 부처의 자손이 몇 대를 두고 퍼지는 동안에는 행여나 마음 큰 인물이 하나 둘 날는지 알겠어요, 하하하하." 하고 그는 제 말을 제가 비웃는 듯이 한바탕 웃고 나서, "그러나 이건 내 진정이외다. 우리도 이렇게 고국을 떠나 있지마는 그래도 고국 소식이 궁금해서 신문 하나는 늘 보지요. 하지만 어디 시원한 소식이 있어요. 그저 조리복소니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면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고, 눈곱만한 야심을 가지고, 서 푼어치 안 되는 이상을 가지고 찧고 까불고 싸우고 하는 것밖에 안 보이니 이거 어디 살 수가 있나. 그래서 나는 마음 큰 자손을 낳아서 길러 볼까 하고 이를테면 새 민족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고, 둘째 단군, 둘째 아브라함이나 하나 낳아 볼까 하고 하하하하앗하." 하고 유쾌하게, 그러나 비통하게 웃소. 나는 저녁을 굶어서 배가 고프고, 밤길을 걸어서 몸이 곤한 것도 잊고 그의 말을 들었소. 부인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호떡을 큰 뚝배기에 담고 김치를 작은 뚝배기에 담고, 또 돼지고기 삶은 것을 한 접시 담아다가 탁자 위에 놓소. 건넌방이라고 할 만한 방에서 젖먹이 우는 소리가 들리오. 부인은 삼십이나 되었을까, 남편은 서른댓 되었을 듯한 키가 훨쩍 크고 눈과 코가 크고 손도 큰 건장한 대장부요, 음성이 부드러운 것이 체격에 어울리지 아니하나 그것이 아마 그의 정신 생활이 높은 표겠지요. "신문에서 최 선생이 학교를 고만두시게 되었다는 말도 보았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다 최 선생에게 대한 중상인 줄을 짐작하였고, 또 오늘 이렇게 만나 보니까 더구나 그것이 다 중상인 줄을 알지요." 하고 그는 확신 있는 어조로 말하오. "고맙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소. "아, 머, 고맙다고 하실 것도 없지요." 하고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참이나 생각을 하더니 우선 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내가 최 선생이 당하신 경우와 꼭 같은 경우를 당하였거든요. 이를테면 과부 설움은 동무 과부가 안다는 것이지요." 하고 그는 자기의 내력을 말하기 시작하오. "내 집은 본래 서울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내 선친께서 시국에 대해서 불평을 품고 당신 삼 형제의 가족을 끌고 재산을 모두 팔아 가지고 간도에를 건너오셨지요. 간도에 맨 먼저 ●●학교를 세운 이가 내 선친이지요." 여기까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소. 그는 R씨라고 간도 개척자요, 간도에 조선인 문화를 세운 이로 유명한 이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오. 나는 그의 이름이 누구인지도 물어 볼 것 없이 알았소. "아 그러십니까. 네, 그러세요." 하고 나는 감탄하였소. "네, 내 선친을 혹 아실는지요. 선친의 말씀이 노 그러신단 말씀야요. 조선 사람은 속이 좁아서 못쓴다고 <정감록>에도 그런 말이 있다고 조선은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사람의 마음이 작아서 큰일하기가 어렵고, 큰사람이 나기가 어렵다고. 웬만치 큰사람이 나면 서로 시기해서 큰일할 새가 없이 한다고 그렇게 <정감록>에도 있다더군요. 그래서 선친께서 자손에게나 희망을 붙이고 간도로 오신 모양이지요. 거기서 자라났다는 것이 내 꼴입니다마는, 아하하. 내가 자라서 아버지께서 세우신 K여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일입니다. 지금 내 아내는 그 때 학생으로 있었구. 그러자 내 아버지께서 재산이 다 없어져서 학교를 독담하실 수가 없고, 또 얼마 아니해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보니 학교에는 세력 다툼이 생겨서 아버지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나를 배척하게 되었단 말씀이오. 거기서 나를 배척하는 자료를 삼은 것이 나와 지금 내 아내가 된 학생의 관계란 것인데 이것은 전연 무근지설인 것은 말할 것도 없소. 나도 총각이요, 그는 처녀니까 혼인을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마는 그것이 사제 관계라면 중대 문제거든. 그래서 나는 단연히 사직을 하고 내가 사직한 것은 제 죄를 승인한 것이라 하여서 그 학생 지금 내 아내도 출교 처분을 당한 것이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의 아버지 내 장인이지요 그 여자의 아버지는 나를 죽일 놈같이 원망을 하고 그 딸을 죽일 년이라고 감금을 하고 어쨌으나 조그마한 간도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단 말이오. 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은 지금 내 아내인, 그 딸의 자백이오. 무어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오, 그 사람한테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가오, 하고 뻗댔단 말요. 나는 이 여자가 이렇게 나를 생각하는가 할 때 의분심이 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여자와 혼인하리라고 결심을 하였소. 나는 마침내 정식으로 K장로라는 내 장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단박에 거절을 당하고 말았지요. K장로는 그 딸을 간도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서울로 보내기로 하였단 말을 들었소. 그래서 나는 최후의 결심으로 그 여자 지금 내 아내 된 사람을 데리고 간도에서 도망하였소. 하하하하. 밤중에 단둘이서. 지금 같으면야 사제간에 결혼을 하기로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마는 그 때에 어디 그랬나요. 사제간에 혼인이란 것은 부녀간에 혼인한다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지요. 더구나 그 때 간도 사회에는 청교도적 사상과 열렬한 애국심이 있어서 도덕 표준이 여간 높지 아니하였지요. 그런 시대니까 내가 내 제자인 여학생을 데리고 달아난다는 것은 살인 강도를 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었지요.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이라는 것보다도 내 생각에는 어찌하였으나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버리려는 그에게 사실 나도 마음 속으로는 그를 사랑하였지요. 다만 사제간이니까 영원히 달할 수는 없는 사랑이라고 단념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비록 부처 생활은 못 하더라도 내가 그의 사랑을 안다는 것과 나도 그를 이만큼 사랑한다는 것만을 보여 주자는 것이지요. 때는 마침 가을이지마는, 몸에 지닌 돈도 얼마 없고 천신만고로 길림까지를 나와 가지고는 배를 타고 송화강을 내려서 하얼빈에 가 가지고 거 기서 간신히 치타까지의 여비와 여행권을 얻어 가지고 차를 타고 떠나지 않았어요. 그것이 바로 십여 년 전 오늘이란 말이오." 이 때에 부인이 옥수수로 만든 국수와 감자 삶은 것을 가지고 들어오오. 나는 R의 말을 듣던 끝이라 유심히 부인을 바라보았소. 그는 중키나 되는 둥근 얼굴이 혈색이 좋고 통통하여 미인이라기보다는 씩씩한 여자요. 그런 중에 조선 여자만이 가지는 아담하고 점잖은 맛이 있소. "앉으시지요. 지금 두 분께서 처음 사랑하시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부인에게 교의를 권하였소. "아이, 그런 말씀은 왜 하시오." 하고 부인은 갑자기 십 년이나 어려지는 모양으로 수삽한 빛을 보이고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오. "그래서요. 그래 오늘이 기념일이외다그려." 하고 나도 웃었소. "그렇지요. 우리는 해마다 오늘이 오면 우리 무덤에 성묘를 가서 하룻밤을 새우지요.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중간에 돌아왔지만, 하하하하." 하고 그는 유쾌하게 웃소. "성묘라니?" 하고 나는 물었소. "아까 보신 두 별 무덤 말이오. 그것이 우리 내외의 무덤이지요. 하하하하." "…………." 나는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앉았소. "내 이야기를 들으시지요. 그래 둘이서 차를 타고 오지 않았겠어요. 물론 여전히 선생님과 제자지요. 그렇지만 워낙 여러 날 단둘이서 같이 고생을 하고 여행을 했으니 사랑의 불길이 탈 것이야 물론 아니겠어요. 다만 사제라는 굳은 의리가 그것을 겉에 나오지 못하도록 누른 것이지요. ……그런데 꼭 오늘같이 좋은 날인데 여기는 대개 일기가 일정합니다. 좀체로 비가 오는 일도 없고 흐리는 날도 없지요. 헌데 F역에를 오니까 참 석양 경치가 좋단 말이오. 그 때에 불현듯, 에라 여기서 내려서 이 석양 속에 저 호숫 가에 둘이서 헤매다가 깨끗이 사제의 몸으로 이 깨끗한 광야에 묻혀 버리자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그래 그 때 말을 내 아내 그 때에는 아직 아내가 아니지요 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였더니 참 좋다고 박장을 하고 내 어깨에 매달리는구려. 그래서 우리 둘은 차가 거의 떠날 임박해서 차에서 뛰어내렸지요." 하고 그는 그때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모양으로 말을 끊고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오. 그러나 그의 입 언저리에는 유쾌한 회고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소. "이야기 다 끝났어요?" 하고 부인이 크바스라는 청량 음료를 들고 들어오오. "아니오. 이제부터가 정통이니 당신도 거기 앉으시오. 지금 차에서 내린 데까지 왔는데 당신도 앉아서 한 파트를 맡으시오." 하고 R는 부인의 손을 잡아서 자리에 앉히오. 부인도 웃으면서 앉소. "최 선생 처지가 꼭 나와 같단 말요. 정임의 처지가 당신과 같고." 하고 그는 말을 계속하오. "그래 차에서 내려서 나는 이 양반하고 물을 찾아 헤매었지요. 아따, 석양이 어떻게 좋은지 이 양반은 박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 둘은 마치 유쾌하게 산보하는 사람 같았지요." "참 좋았어요. 그 때에는 참 좋았어요. 그 석양에 비친 광야와 호수라는 건 어떻게 좋은지 그 수은 같은 물 속에 텀벙 뛰어들고 싶었어요. 그 후엔 해마다 보아도 그만 못해." 하고 부인이 참견을 하오. 아이들은 다 자는 모양이오. "그래 지향없이 헤매는데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구, 어스름은 기어들고 그 때 마침 하늘에는 별 둘이 나타났단 말이야. 그것을 이 여학생이 먼저 보고서 갑자기 추연해지면서 선생님 저 별 보셔요, 앞선 큰 별은 선생님이 구 따라가는 작은 별은 저야요, 하겠지요. 그 말이, 또 그 태도가 어떻게 가련한지. 그래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니깐 과연 별 두 개가 지는 해를 따르는 듯이 따라간다 말요.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우리 신세와도 같지 않아요? 그리고는 이 사람이 또 이럽니다그려 `선생님, 앞선 큰 별은 아무리 따라도 저 작은 별은 영원히 따라잡지 못하겠지요. 영원히 영원히 따라가다가 따라가다가 못 해서 마침내는 저 작은 별은 죽어서 검은 재가 되고 말겠지요? 저 작은 별이 제 신세와 어쩌면 그리 같을까.' 하고 한탄을 하겠지요. 그 때에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섰는 어린 처녀의 석양빛에 비췬 모양을 상상해 보세요, 하하하하. 그 때에는 당신도 미인이었소. 하하하하." 하고 내외가 유쾌하게 웃는 것을 보니 나는 더욱 적막하여짐을 깨달았소. 어쩌면 그 석양, 그 두 별이 이들에게와 내게 꼭 같은 인상을 주었을까 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소. "그래 인제." 하고 R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오. "그래 인제 둘이서 그야말로 감개무량하게 두 별을 바라보며 걸었지요. 그러다가 해가 넘어가고 앞선 큰 별이 넘어가고 그리고는 혼자서 깜빡깜빡하고 가던 작은 별이 넘어가니 우리는 그만 땅에 주저앉았소. 거기가 어딘고 하니 그 두 별 무덤이 있는 곳이지요. `선생님 저를 여기다가 파묻어 주시고 가셔요. 선생님 손수 저를 여기다가 묻어 놓고 가 주셔요.' 하고 이 사람이 조르지요." 하는 것을 부인은, "내가 언제." 하고 남편을 흘겨보오. "그럼 무에라고 했소? 어디 본인이 한 번 옮겨 보오." 하고 R가 말을 끊소. "간도를 떠난 지가 한 달이 되도록 단둘이 다녀도 요만큼도 귀해 주는 점이 안 뵈니 그럼 파묻어 달라고 안 해요?" 하고 부인은 웃소. "흥흥." 하고 R는 부인의 말에 웃고 나서, "그 자리에 묻어 달란 말을 들으니까, 어떻게 측은한지, 그럼 나도 함께 묻히자고 그랬지요. 나는 그 때에 참말 그 자리에 함께 묻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손으로 곧 구덩이를 팠지요. 떡가루 같은 모래판이니까 파기는 힘이 아니 들겠지요. 이이도 물끄러미 내가 땅을 파는 것을 보고 섰더니만 자기도 파기를 시작하겠지요." 하고 내외가 다 웃소. "그래 순식간에……." 하고 R는 이야기를 계속하오. "순식간에 둘이 드러누울 만한 구덩이를 아마 두 자 깊이나 되게, 네모나게 파 놓고는 내가 들어가 누워 보고 그러고는 또 파고 하여 아주 편안한 구덩이를 파고 나서는 나는 아주 세상을 하직할 셈으로 사방을 둘러보 고 사방이래야 컴컴한 어둠밖에 없지만 사방을 둘러보고, 이를테면 세상과 작별을 하고 드러누웠지요. 지금 이렇게 회고담을 할 때에는 우습기도 하지마는 그 때에는 참으로 종교적이라 할 만한 엄숙이었소. 그때 우리 둘의 처지는 앞도 절벽, 뒤도 절벽이어서 죽는 길밖에 없었지요. 또 그뿐 아니라 인생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사랑의 맑은 정이 타고 가장 기쁘고도 슬프고도 이를테면 모든 감정이 절정에 달하고, 그러한 순간에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요, 가장 마땅한 일같이 생각하였지요. 광야에 아름다운 황혼이 순간에 스러지는 모양으로 우리 두 생명의 아름다움도 순간에 스러지자는 우리는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지마는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 둘에게 그러한 생각을 넣어 준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저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자기도 내 곁에 들어와 눕겠지요. 그런 뒤에는 황혼에 남은 빛도 다 스러지고 아주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되어 버렸지요. 하늘에 어떻게 그렇게 별이 많은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참 별이 많아요. 우주란 참 커요. 그런데 이 끝없이 큰 우주에 한없이 많은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제 길을 지켜서 서로 부딪지도 아니하고 끝없이 긴 시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에는 어떤 주재하는 뜻, 섭리하는 뜻이 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나도 예수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마는 이 때처럼 하나님이라 할까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우주의 섭리자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한 일은 없었지요.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에 비기면 저까짓 별들이 다 무엇이오?' 하고 그때 겨우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이이가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할 때에는 나도 참으로 놀랐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오륙 년 상관밖에 안 되지마는 이십 세 내외에 오륙 년 상관이 적은 것인가요? 게다가 나는 선생이요 자기는 학생이니까 어린애로만 알았던 것이 그런 말을 하니 놀랍지 않아요? 어째서 사람의 마음이 하늘보다도 더 이상할까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 대답이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지마는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이 하늘이나 땅에 일어나는 모든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알 수 없고 더 뜨겁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러겠지요. 생명이란 모든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요. 그 말에, `그렇다 하면 이 아름답고 신비한 생명을 내는 우주는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오?' 하고 내가 반문하니까, 당신(부인을 향하여) 말이, `전 모르겠어요, 어쨌으나 전 행복합니다. 저는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놓쳐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행복 선생님 곁에 있는 이 행복을 꽉 안고 죽고 싶어요.' 그러지 않았소?" "누가 그랬어요? 아이 난 다 잊어버렸어요." 하고 부인은 차를 따르오. R는 인제는 하하하 하는 웃음조차 잊어버리고, 부인에게 농담을 붙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종교적 엄숙 그대로말을 이어, "`자 저는 약을 먹어요.' 하고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이 감행되겠지요. 약이란 것은 하얼빈에서 준비한 아편이지요. 하얼빈서 치타까지 가는 동안에 흥안령이나 어느 삼림지대나 어디서나 죽을 자리를 찾자고 준비한 것이니까. 나는 입 근처로 가는 그의 손을 붙들었어요. 붙들면서 나는 `잠깐만 기다리오. 오늘 밤 안으로 그 약을 먹으면 고만이 아니오? 이 행복된 순간을 잠깐이라도 늘립시다. 달 올라올 때까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선생님도 행복되셔요? 선생님은 불행이시지. 저 때문에 불행이시지. 저만 이곳에 묻어 주시구는 선생님은 세상에 돌아가 사셔요, 오래오래 사셔요, 일 많이 하고 사셔요.' 하고 울지 않겠어요. 나는 그 때에 내 아내가 하던 말을 한 마디도 잊지 아니합니다. 그 말을 듣던 때의 내 인상은 아마 일생 두고 잊히지 아니하겠지요. 나는 자백합니다.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내 아내를 안고 키스를 하였지요. 내 속에 눌리고 눌리고 쌓이고 하였던 열정이 그만 일시에 폭발되었던 것이오. 아아 이것이 최초의 것이요, 동시에 최후의 것이로구나 할 때에 내 눈에서는 끓는 듯한 눈물이 흘렀소이다. 두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소리, 두 사람의 풀무 불길 같은 숨소리. 이윽고 달이 떠올라 왔습니다. 가이없는 벌판이니까 달이 뜨니까 갑자기 천지가 환해지고 우리 둘이 손으로 파서 쌓아 놓은 흙무더기가 이 산 없는 세상에 산이나 되는 것같이 조그마한 검은 그림자를 지고 있겠지요. `자 우리 달빛을 띠고 좀 돌아다닐까.' 하고 나는 아내를 안아 일으켰지요. 내 팔에 안겨서 고개를 뒤로 젖힌 내 아내의 얼굴이 달빛에 비친 양을 나는 잘 기억합니다. 실신한 듯한, 만족한 듯한, 그리고도 절망한 듯한 그 표정을 무엇으로 그릴지 모릅니다. 그림도 그릴 줄 모르고 조각도 할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그립니까. 그저 가슴 속에 품고 이렇게 오늘의 내 아내를 바라볼 뿐이지요. 나는 내 아내를 팔에 걸고 네, 걸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요 이렇게 팔에다 걸고 달빛을 받은 황량한 벌판, 아무리 하여도 환하게 밝아지지는 아니하는 벌판을 헤매었습니다. 이따금 내 아내가, `어서 죽고 싶어요, 전 죽고만 싶어요.' 하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 하고. 죽고 싶다는 그 말은 물론 진정일 것이지요. 아무리 맑은 일기라 하더라도 오후가 되면 흐려지는 법이니까 오래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한 모양으로 이 순간같이 깨끗하고 뜨거운 기분으로 갈 수는 없지 않아요? 불쾌한 일도 생기고, 보기 흉한 일도 생길는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이 완전한 깨끗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행복 속에 죽어 버리자는 뜻을 나는 잘 알지요. 더구나 우리들이 살아 남는대야 앞길이 기구하지 평탄할 리는 없지 아니해요? 그래서 나는 `죽지, 우리 이 달밤에 실컷 돌아다니다가, 더 돌아다니기가 싫거든 그 구덩에 돌아가서 약을 먹읍시다.' 이렇게 말하고 우리 둘은 헤맸지요. 낮에 보면 어디까지나 평평한 벌판인 것만 같지마는 달밤에 보면 이 사막에도 아직 채 스러지지 아니한 산의 형적이 남아 있어서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있겠지요. 그 그림자 속에는 걸어 들어가면 어떤 데는 우리 허리만큼 그림자에 가리우고 어떤 데는 우리 둘을 다 가리워 버리는 데도 있단 말야요. 죽음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나면 그래도 몸에 소름이 끼쳐요. 차차 달이 높아지고 추위가 심해져서 바람결이 지나갈 때에는 눈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요. 원체 대기 중에 수분이 적으니까 서리도 많지 않지마는, 그래도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은 다 얼어 버려서 얼음가루가 되었는 게지요. 공중에는 반짝반짝하는 수정가루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낮에는 땀이 흐르리만큼 덥던 사막도 밤이 되면 이렇게 기온이 내려가지요. 춥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춥다는 말은 아니 하고 우리는 어떤 때에는 달을 따라서, 어떤 때에는 달을 등지고, 어떤 때에는 호수에 비친 달을 굽어보고, 이 모양으로 한없이 말도 없이 돌아다녔지요. 이 세상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힘껏 의식하려는 듯이. 마침내 `나는 더 못 걸어요.' 하고 이이가 내 어깨에 매달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고 R가 부인을 돌아보니 부인은 편물하던 손을 쉬고, "다리가 아픈 줄은 모르겠는데 다리가 이리 뉘구 저리 뉘구 해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어요. 춥기는 하구." 하고 소리를 내어서 웃소. "그럴 만도 하지." 하고 R는 긴장한 표정을 약간 풀고 앉은 자세를 잠깐 고치며, "그 후에 그 날 밤 돌아다닌 곳을 더듬어 보니까,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삼십 리는 더 되는 것 같거든. 다리가 아프지 아니할 리가 있나."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계속하오. "그래서 나는 내 외투를 벗어서, 이이(부인)를 싸서 어린애 안듯이 안고 걸었지요. 외투로 쌌으니 자기도 춥지 않구, 나는 또 무거운 짐을 안았으니 땀이 날 지경이구, 그뿐 아니라 내가 제게 주는 최후의 서비스라 하니 기쁘고, 말하자면 일거 삼득이지요. 하하하하. 지난 일이니 웃지마는 그 때 사정을 생각해 보세요, 어떠했겠나." 하고 R는 약간 처참한 빛을 띠면서, "그러니 그 구덩이를 어디 찾을 수가 있나. 얼마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죽을 생각도 해 보았지마는 몸뚱이를 그냥 벌판에 내놓고 죽고 싶지는 아니하고 또 그 구덩이가 우리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기어코 그것을 찾아 내고야 말았지요. 그 때는 벌써 새벽이 가까웠던 모양이오. 열 시나 넘어서 뜬 하현달이 낮이 기울었으니 그렇지 않겠어요. 그 구덩이에 와서 우리는 한 번 더 하늘과 달과 별과,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른 사람들과 하직하고 약 먹을 준비를 했지요. 약을 검은 고약과 같은 아편을 맛이 쓰다는 아편을 물도 없이 먹으려 들었지요. 우리 둘은 아까 모양으로 가지런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달이 밝으니까 보이던 별들 중에 숨은 별이 많고 또 별들의 위치 우리에게 낯익은 북두칠성 자리도 변했을 것 아니야요. 이상한 생각이 나요. 우리가 벌판으로 헤매는 동안에 천지가 모두 변한 것 같아요. 사실 변하였지요. 그 변한 것이 우스워서 나는 껄껄 웃었지요. 워낙 내가 웃음이 좀 헤프지만 이 때처럼 헤프게 실컷 웃어 본 일은 없습니다. 왜 웃느냐고 아내가 좀 성을 낸 듯이 묻기로, `천지와 인생이 변하는 것이 우스워서 웃었소.' 그랬지요. 그랬더니, `천지와 인생은 변할는지 몰라도 내 마음은 안 변해요!' 하고 소리를 지르겠지요. 퍽 분개했던 모양이야." 하고 R는 그 아내를 보오. "그럼 분개 안 해요? 남은 죽을 결심을 하고 발발 떨구 있는데 곁에서 껄껄거리고 웃으니, 어째 분하지가 않아요. 나는 분해서 달아나려고 했어요." 하고 부인은 아직도 분함이 남은 것같이 말하오. "그래 달아나지 않았소?" 하고 R는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고 달아나는 흉내를 팔과 다리로 내고 나서, "이래서 죽는 시간이 지체가 되었지요. 그래서 내가 빌고 달래고 해서 가까스로 안정을 시키고 나니 손에 쥐었던 아편이 땀에 푹 젖었겠지요. 내가 웃은 것은 죽기 전 한 번 천지와 인생을 웃어 버린 것인데 그렇게 야단이니…… 하하하하." R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참 목도 마르기도 하더니. 입에는 침 한 방울 없고. 그러나 못물을 먹을 생각도 없고. 나중에는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안 돌아가겠지요. 이러는 동안에 달빛이 희미해지길래 웬일인가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해가 떠오릅니다그려. 어떻게 붉고 둥글고 씩씩한지. `저 해 보오.' 하고 나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구덩이에서 뛰어나왔지요." 하고 빙그레 웃소. R의 빙그레 웃는 양이 참 좋았소. "내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이도 뿌시시 일어났지요. 그 해! 그 해의 새 빛을 받는 하늘과 땅의 빛! 나는 그것을 형용할 말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만 힘껏 소리치고 싶고 기운껏 달음박질치고 싶은 생각이 날 뿐이어요. `우리 삽시다, 죽지 말고 삽시다, 살아서 새 세상을 하나 만들어 봅시다.' 이렇게 말하였지요. 하니까 이이가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아요. 그러나 마침내 아내도 죽을 뜻을 변하였지요. 그래서 남 선생을 청하여다가 그 말씀을 여쭈었더니 남 선생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고 우리 둘의 혼인 주례를 하셨지요. 그 후 십여 년에 우리는 밭 갈고 아이 기르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언제나 여기 새 민족이 생기고 누가 새 단군이 될는지요. 하하하하, 아하하하. 피곤하시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하고 R는 말을 끊소. 나는 R부처가 만류하는 것도 다 뿌리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소. R와 함께 달빛 속, 개 짖는 소리 속을 지나서 아라사 사람의 조그마한 여관으로 돌아왔소. 여관 주인도 R를 아는 모양이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또 내게 대한 부탁도 하는 모양인가 보오. R는 내 방에 올라와서 내일 하루 지날 일도 이야기하고 또 남 선생과 정임에게 관한 이야기도 하였으나,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을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마음 없는 대답을 할 뿐이었소. R가 돌아간 뒤에 나는 옷도 벗지 아니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소. 페치카를 때기는 한 모양이나 방이 써늘하기 그지없소. `그 두 별 무덤이 정말 R와 그 여학생과 두 사람이 영원히 달치 못할 꿈을 안은 채로 깨끗하게 죽어서 묻힌 무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다 하면 내일 한 번 더 가서 보토라도 하고 오련마는.' 하고 나는 R부처의 생활에 대하여 일종의 불만과 환멸을 느꼈소. 그리고 내가 정임을 여기나 시베리아나 어떤 곳으로 불러다가 만일 R와 같은 흉내를 낸다 하면, 하고 생각해 보고는 나는 진저리를 쳤소. 나는 내머리 속에 다시 그러한 생각이 한 조각이라도 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였소. 급행을 기다리자면 또 사흘을 기다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기로 나는 이튿날 새벽에 떠나는 구간차를 타고 F역을 떠나 버렸소. R에게는 고맙다는 편지 한 장만을 써 놓고. 나는 R를 더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소. 그것은 반드시 R를 죄인으로 보아서 그런 것은 아니오마는 그저 나는 다시 R를 대면하기를 원치 아니한 것이오. 나는 차가 R의 집 앞을 지날 때에도 R의 집에 대하여서는 외면하였소. 이 모양으로 나는 흥안령을 넘고, 하일라르의 솔밭을 지나서 마침내 이 곳에 온 것이오. 형! 나는 인제는 이 편지를 끝내오. 더 쓸 말도 없거니와 인제는 이것을 쓰기도 싫증이 났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바이칼에 물결이 흉용하더니 이 편지를 끝내는 지금에는 가의 가까운 물에는 얼음이 얼었소.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물이 늠실늠실 하얗게 눈 덮인 산 빛과 어울리게 되었소. 사흘이나 이어서 오던 눈이 밤새에 개고 오늘 아침에는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날리고 있소. 나는 이 얼음 위로 걸어서 저 푸른 물 있는 곳까지 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 없소. 더구나 이 편지도 다 쓰고 나니, 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할 마지막 일까지 다 한 것 같소. 내가 이 앞에 어디로 가서 어찌 될는지는 나도 모르지마는 희미한 소원을 말하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 지대로 한정 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목숨을 마치고 싶소. 최석 군은 `끝'이라는 글자를 썼다가 지워 버리고 딴 종이에다가 이런 말을 썼다 다 쓰고 나니 이런 편지도 다 부질없는 일이오. 내가 이런 말을 한대야 세상이 믿어 줄 리도 없지 않소. 말이란 소용 없는 것이오. 내가 아무리 내 아내에게 말을 했어도 아니 믿었거든 내 아내도 내 말을 아니 믿었거든 하물며 세상이 내 말을 믿을 리가 있소.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내 말 중에서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만은 믿고, 또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은 마음대로 고치고 뒤집고 보태고 할 것이니까, 나는 이 편지를 쓴 것이 한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인 줄을 깨달았소. 형이야 이 편지를 아니 보기로니 나를 안 믿겠소? 그 중에는 혹 형이 지금까지 모르던 자료도 없지 아니하니, 형만 혼자 보시고 형만 혼자 내 사정을 알아 주시면 다행이겠소. 세상에 한 믿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저마다 하는 일이겠소? 나는 이 쓸데없는 편지를 몇 번이나 불살라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래도 거기도 일종의 애착심이 생기고 미련이 생기는구려. 형 한 분이라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려. 내가 S형무소에 입감해 있을 적에 형무소 벽에 죄수가 손톱으로 성명을 새긴 것을 보았소. 뒤에 물었더니 그것은 흔히 사형수가 하는 짓이라고. 사형수가 교수대에 끌려 나가기 바로 전에 흔히 손톱으로 담벼락이나 마룻바닥에 제 이름을 새기는 일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소. 내가 형에게 쓰는 이 편지도 그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요? 형! 나는 보통 사람보다는, 정보다는 지로, 상식보다는 이론으로, 이해보다는 의리로 살아 왔다고 자신하오. 이를테면 논리학적으로 윤리학적으로 살아온 것이라고 할까. 나는 엄격한 교사요, 교장이었소. 내게는 의지력과 이지력밖에 없는 것 같았소. 그러한 생활을 수십 년 해 오지 아니하였소? 나는 이 앞에 몇십 년을 더 살더라도 내 이 성격이나 생활 태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고 자신하였소. 불혹지년이 지났으니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 아니오? 그런데 형! 참 이상한 일이 있소.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처해 있던 환경을벗어나서 호호 탕탕하게 넓은 세계에 알몸을 내어던짐을 당하니 내 마음 속에는 무서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구려. 나는 이 말도 형에게 아니 하려고 생각하였소. 노여워하지 마시오, 내게까지도 숨기느냐고. 그런 것이 아니오, 형은커녕 나 자신에게까지도 숨기려고 하였던 것이오. 혹시 그런 기다리지 아니 하였던 원,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의 하늘에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아니하였던,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나는 스스로 놀라고 스스로 슬퍼하였소. 그래서 스스로 숨기기로 하였소. 그 숨긴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열정이요, 정의 불길이요, 정의 광풍이요, 정의 물결이오. 만일 내 의식이 세계를 평화로운 풀 있고, 꽃 있고, 나무 있는 벌판이라고 하면 거기 난데없는 미친 짐승들이 불을 뿜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영각을 하고 날쳐서, 이 동산의 평화의 화초를 다 짓밟아 버리고 마는 그러한 모양과 같소. 형! 그 이상야릇한 짐승들이 여태껏, 사십 년 간을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소? 그러다가 인제 뛰어나와 각각 제 권리를 주장하오? 지금 내 가슴 속은 끓소. 내 몸은 바짝 여위었소. 그것은 생리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타는 것이요, 연소하는 것이오. 그래서 다만 내 몸의 지방만이 타는 것이 아니라, 골수까지 타고, 몸이 탈 뿐이 아니라 생명 그 물건이 타고 있는 것이오. 그러면 어찌할까. 지위, 명성, 습관, 시대 사조 등등으로 일생에 눌리고 눌렸던 내 자아의 일부분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오? 한 번도 자유로 권세를 부려 보지 못한 본능과 감정들이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날뛰어 보려는 것이오. 이것이 선이오? 악이오? 그들은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고 신성하다고 여기던 모든 권위를 모조리 둘러엎으려고 드오. 그러나 형! 나는 도저히 이 혁명을 용인할 수가 없소. 나는 죽기까지 버티기로 결정을 하였소. 내 속에서 두 세력이 싸우다가 싸우다가 승부가 결정이 못 된다면 나는 승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기를 그만두려오. 나는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들어가려오. 나는 V라는 대삼림 지대가 어디인 줄도 알고 거기를 가려면 어느 정거장에서 내릴 것도 다 알아 놓았소. 만일 단순히 죽는다 하면 구태여 멀리 찾아갈 필요도 없지마는 그래도 나 혼자로는 내 사상과 감정의 청산을 하고 싶소. 살 수 있는 날까지 세상을 떠난 곳에서 살다가 완전한 해결을 얻는 날 나는 혹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종막을 닫칠 것이오. 만일 해결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치면 그만이지요. 나는 이 붓을 놓기 전에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 하나는 하려오. 꿈이 하도 수상해서 마치 내 전도에 대한 신의 계시와도 같기로 하는 말이오. 그 꿈은 이러하였소. 내가 꽁이깨(꼬이까라는 아라사말로 침대라는 말이 조선 동포의 입으로 변한 말이오.) 짐을 지고 삽을 메고 눈이 덮인 삼림 속을 혼자 걸었소. 이 꽁이깨 짐이란 것은 금점꾼들이 그 여행 중에 소용품, 마른 빵, 소금, 내복 등속을 침대 매트리스에 넣어서 지고 다니는 것이오. 이 짐하고 삽 한 개, 도끼 한 개, 그것이 시베리아로 금을 찾아 헤매는 조선 동포들의 행색이오. 내가 이르쿠츠크에서 이러한 동포를 만났던 것이 꿈으로 되어 나온 모양이오. 나는 꿈에는 세상을 다 잊어버린, 아주 깨끗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이 꽁이깨 짐을 지고 삽을 메고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으나 땅은 눈빛으로 희고, 하늘은 구름빛으로 회색인 삼림 지대를 허덕허덕 걸었소. 길도 없는 데를, 인적도 없는 데를. 꿈에도 내 몸은 퍽 피곤해서 쉴 자리를 찾는 마음이었소. 나는 마침내 어떤 언덕 밑 한 군데를 골랐소. 그리고 상시에 이야기에서 들은 대로 삽으로 내가 누울 자리만한 눈을 치고, 그리고는 도끼로 곁에 선 나무 몇 개를 찍어 누이고 거기다가 불을 놓고 그 불김에 녹은 땅을 두어 자나 파내고 그 속에 드러누웠소. 훈훈한 것이 아주 편안하였소. 하늘에는 별이 반짝거렸소. F역에서 보던 바와 같이 큰 별 작은 별도 보이고 평시에 보지 못하던 붉은 별, 푸른 별 들도 보였소. 나는 이 이상한 하늘, 이상한 별들이 있는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노라니까 문득 어디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소. 퉁퉁퉁퉁 우루루루…… 나는 벌떡 일어나려 하였으나 몸이 천 근이나 되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소. 가까스로 고개를 조금 들고 보니 뿔이 길다랗고 눈이 불같이 붉은 사슴의 떼가 무엇에 놀랐는지 껑충껑충 뛰어 지나가오. 이것은 아마 크로포트킨의 <상호 부조론> 속에 말한 시베리아의 사슴의 떼가 꿈이 되어 나온 모양이오. 그러더니 그 사슴의 떼가 다 지나간 뒤에, 그 사슴의 떼가 오던 방향으로서 정임이가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르륵 하고 미끄러져 오오. 마치 인형을 밀어 주는 것같이. "정임아!" 하고 나는 소리를 치고 몸을 일으키려 하였소. 정임의 모양은 나를 잠깐 보고는 미끄러지는 듯이 흘러가 버리오. 나는 정임아, 정임아를 부르고 팔다리를 부둥거렸소. 그러다가 마침내 내 몸이 번쩍 일으켜짐을 깨달았소. 나는 정임의 뒤를 따랐소. 나는 눈 위로 삼림 속으로 정임의 그림자를 따랐소. 보일 듯 안 보일 듯, 잡힐 듯 안 잡힐 듯,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정임을 따랐소. 정임은 이 추운 날이언만 눈과 같이 흰 옷을 입었소. 그 옷은 옛날 로마 여인의 옷과 같이 바람결에 펄렁거렸소. "오지 마세요. 저를 따라오지 못하십니다." 하고 정임은 눈보라 속에 가리워 버리고 말았소.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눈보라가 다 지나간 뒤에도 붉은 별, 푸른 별과 뿔 긴 사슴의 떼뿐이오. 정임은 보이지 아니하였소. 나는 미칠 듯이 정임을 찾고 부르다가 잠을 깨었소. 꿈은 이것뿐이오. 꿈을 깨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인 바이칼호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어 있었소.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 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 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 견디겠소. 형! 나는 자백하지 아니할 수 없소. 이 꿈은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설명한 것이라고. 그러나 형! 나는 이것을 부정하려오. 굳세게 부정하려오. 나는 이 꿈을 부정하려오. 억지로라도 부정하려오. 나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난 혁명을 용인하지 아니하려오. 나는 그것을 혁명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려오. 아니오! 아니오! 그것은 반란이오! 내 인격의 통일에 대한 반란이오. 단연코 무단적으로 진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반란이오. 보시오! 나는 굳게 서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오. 만일에 형이 광야에 구르는 내 시체나 해골을 본다든지, 또는 무슨 인연으로 내 무덤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고 하면 그 때에 형은 내가 이 모든 반란을 진정한 개선의 군주로 죽은 것을 알아 주시오. 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오. 아디유!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 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 맡기오. 아디유! 이것으로 최석 군의 편지는 끝났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이것이 일 편의 소설이라 하더라도 슬픈 일이어든, 하물며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친구의 일임에야. 이 편지를 받고 나는 곧 최석 군의 집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이 집에서는아이들이 마당에서 떠들고 있었다. "삼청동 아자씨 오셨수. 어머니, 삼청동 아자씨." 하고 최석 군의 작은딸이 나를 보고 뛰어들어갔다. 최석의 부인이 나와 나를 맞았다. 부인은 머리도 빗지 아니하고, 얼굴에는 조금도 화장을 아니하고, 매무시도 흘러내릴 지경으로 정돈되지 못하였다. 일 주일이나 못 만난 동안에 부인의 모양은 더욱 초췌하였다. "노석헌테서 무슨 기별이나 있습니까." 하고 나는 무슨 말로 말을 시작할지 몰라서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오. 왜 그이가 집에 편지하나요?" 하고 부인은 성난 빛을 보이며, "집을 떠난 지가 근 사십 일이 되건만 엽서 한 장 있나요. 집안 식구가 다 죽기로 눈이나 깜짝할 인가요. 그저 정임이헌테만 미쳐서 죽을지 살지를 모르지요." 하고 울먹울먹한다. "잘못 아십니다. 부인께서 노석의 마음을 잘못 아십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나는 확신 있는 듯이 말을 시작하였다. "노석의 생각을 부인께서 오해하신 줄은 벌써부터 알았지마는 오늘 노석의 편지를 받아보고 더욱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고 나는 부인의 표정의 변화를 엿보았다. "편지가 왔어요?" 하고 부인은 놀라면서, "지금 어디 있어요? 일본 있지요?" 하고 질투의 불길을 눈으로 토하였다. "일본이 아닙니다. 노석은 지금 아라사에 있습니다." "아라사요?" 하고 부인은 놀라는 빛을 보이더니, "그럼 정임이를 데리고 아주 아라사로 가케오치를 하였군요." 하고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보이고는 몸을 한 번 떨었다. 부인은 남편과 정임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이렇게 경련적인 웃음을 웃고 몸을 떠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닙니다. 노석은 혼자 가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를 마세요." 하고 나는 보에 싼 최석의 편지를 내어서 부인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이것을 보시면 다 아실 줄 압니다. 어쨌으나 노석은 결코 정임이를 데리고 간 것이 아니요, 도리어 정임이를 멀리 떠나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대 문제가 있습니다. 노석은 이 편지를 보면 죽을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하고 부인의 주의를 질투로부터 그 남편에게 대한 동정에 끌어 보려 하였다. "흥. 왜요? 시체 정사를 하나요? 좋겠습니다. 머리가 허연 것이 딸자식 같은 계집애허구 정사를 한다면 그 꼴 좋겠습니다. 죽으라지요. 죽으래요. 죽는 것이 낫지요. 그리구 살아서 무엇 해요?" 내 뜻은 틀려 버렸다. 부인의 표정과 말에서는 더욱더욱 독한 질투의 안개와 싸늘한 얼음가루가 날았다. 나는 부인의 이 태도에 반감을 느꼈다. 아무리 질투의 감정이 강하다 하기로, 사람의 생명이 제 남편의 생명이 위태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 질투의 감정에만 충실하려 하는 그 태도가 불쾌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는 그만큼 말씀해 드렸으니 더 할 말씀은 없습니다. 아무려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것을 읽어 보세요." 하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불쾌하기 그지없는 날이다. 최석의 태도까지도 불쾌하다. 달아나긴 왜 달아나? 죽기는 왜 죽어? 못난 것! 기운 없는 것! 하고 나는 최석이가 곁에 섰기나 한 것처럼 눈을 흘기고 중얼거렸다. 최석의 말대로 최석의 부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요, 그저 보통인 여성일는지 모른다. 그렇다 하면 여자의 마음이란 너무도 질투의 종이 아닐까. 설사 남편 되는 최석의 사랑이 아내로부터 정임에게로 옮아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질투로 회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사랑이 떠난 남편을 네 마음대로 가거라 하고 자발적으로 내어버릴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하면 모르는 체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것은 우리네 남자의 이론이요, 여자로는 이런 경우에 질투라는 반응밖에 없도록 생긴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계가 아홉시를 친다. 남대문 밖 정거장을 떠나는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린다. 나는 만주를 생각하고, 시베리아를 생각하고 최석을 생각하였다. 마음으로는 정임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발표할 수 없어서 시베리아의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방황하는 최석의 모양이 최석의 꿈 이야기에 있는 대로 눈앞에 선하게 떠나온다. `사랑은 목숨을 빼앗는다.' 하고 나는 사랑일래 일어나는 인생의 비극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석의 경우는 보통 있는 공식과는 달라서 사랑을 죽이기 위해서 제 목숨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은 목숨을 빼앗는다.' 는 데에는 다름이 없다. 나는 불쾌도 하고 몸도 으스스하여 얼른 자리에 누웠다. 며느리가 들어온 뒤부터 사랑 생활을 하는 지가 벌써 오 년이나 되었다. 우리 부처란 인제는 한 역사적 존재요, 윤리적 관계에 불과하였다.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은 익숙함이 있고, 집에 없지 못할 사람이라는 필요감도 있지마는 젊은 부처가 가지는 듯한 그런 정은 벌써 없는 지 오래였다. 아내도 나를 대하면 본체만체, 나도 아내를 대하면 본체만체, 무슨 필요가 있어서 말을 붙이더라도 아무쪼록 듣기 싫기를 원하는 듯이 톡톡 내던졌다. 아내도 근래에 와서는 옷도 아무렇게나, 머리도 아무렇게나, 어디 출입할 때밖에는 도무지 화장을 아니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부처의 새가 좋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아내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또 아내의 말에 의하건대 내가 사랑에 있거니 하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우리 부처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다. 나는 한 방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누가 곁에 있으면 잠이 잘 들지 아니하였다. 혹시 어린것들이 매를 얻어맞고 사랑으로 피난을 와서 울다가 내 자리에서 잠이 들면 귀엽기는 귀여워도 잠자리는 편안치 아니하였다.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공상을 하고 있으면 족하였다. 내게는 아무 애욕적 요구도 없었다. 이것은 내 정력이 쇠모한 까닭인지 모른다. 그러나 최석의 편지를 본 그 날 밤에는 도무지 잠이 잘 들지 아니하였다. 최석의 편지가 최석의 고민이 내 졸던 의식에 무슨 자극을 준 듯하였다. 적막한 듯하였다. 허전한 듯하였다. 무엇인지 모르나 그리운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어, 이거 안되었군."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으리 주무셔 곕시오?" 하고 아범이 전보를 가지고 왔다. "명조 경성 착 남정임" 이라는 것이었다. "정임이가 와?" 하고 나는 전보를 다시 읽었다. 최석의 그 편지를 보면 최석 부인에게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고 정임에게는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 자못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부산서 오는 차를 맞으려고 정거장에를 나갔다. 차는 제 시간에 들어왔다. 남정임은 슈트케이스 하나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검은 외투에 검은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더욱 해쓱해 보였다. "선생님!" 하고 정임은 나를 보고 손에 들었던 짐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내 앞으로 왔다. "풍랑이나 없었나?" 하고 나는 내 손에 잡힌 정임의 손이 싸늘한 것을 근심하였다. "네. 아주 잔잔했습니다. 저같이 약한 사람도 밖에 나와서 바다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하고 정임은 사교적인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있는 것 같았다. "최 선생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하고 정임은 나를 따라 서면서 물었다. "나도 지금까지 몰랐는데 어제 편지를 하나 받았지." 하는 것이 내 대답이었다. "네? 편지 받으셨어요? 어디 계십니까?" 하고 정임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몰라." 하고 나도 정임과 같이 걸음을 멈추고, "그 편지를 쓴 곳도 알고 부친 곳도 알지마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그것은 모르지. 찾을 생각도 말고 편지할 생각도 말라고 했으니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어디야요? 그 편지 부치신 곳이 어디야요? 저 이 차로 따라갈 테야요." 하고 정임은 조급하였다. "갈 때에는 가더라도 이 차에야 갈 수가 있나." 하고 나는 겨우 정임을 끌고 들어왔다. 정임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대강 말을 하고, 이튿날 새벽 차로 떠난다는 것을, "가만 있어. 어떻게 계획을 세워 가지고 해야지." 하여 가까스로 붙들어 놓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최석 집에를 가 보려고 할 즈음에 순임이가 와서 마루 끝에 선 채로, "선생님, 어머니가 잠깐만 오십시사구요." 하였다. "정임이가 왔다." 하고 내가 그러니까, "정임이가요?" 하고 순임은 깜짝 놀라면서, "정임이는 아버지 계신 데를 알아요?" 하고 물었다. "정임이도 모른단다. 너 아버지는 시베리아에 계시고 정임이는 동경 있다가 왔는데 알 리가 있니?" 하고 나는 순임의 생각을 깨뜨리려 하였다. 순임은, "정임이가 어디 있어요?" 하고 방들 있는 곳을 둘러보며, "언제 왔어요?" 하고는 그제야 정임에게 대한 반가운 정이 발하는 듯이, "정임아!" 하고 불러 본다. "언니요? 여기 있수." 하고 정임이가 머릿방 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던 채로 고개를 내어민다. 순임은 구두를 차내버리듯이 벗어 놓고 정임의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나는 최석의 집에를 가느라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정임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두 처녀는 울고 있었다. "정임이도 가지. 아주머니 뵈러 안 가?" 하고 나는 정임을 재촉하였다. "선생님 먼저 가 계셔요." 하고 순임이가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이따가 제가 정임이허구 갑니다." 하고 내게 눈을 끔쩍거려 보였다. 갑자기 정임이가 가면 어머니와 정임이와 사이에 어떠한 파란이 일어나지나 아니할까 하고 순임이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순임도 인제는 노성하여졌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선생님 이 편지가 다 참말일까요?" 하고 나를 보는 길로 최석 부인이 물었다. 최석 부인은 히스테리를 일으킨 사람 모양으로 머리와 손을 떨었다. 나는 참말이냐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분명하지 아니하여서, "노석이 거짓말할 사람입니까?" 하고 대체론으로 대답하였다. "앉으십쇼. 앉으시란 말씀도 안 하고." 하고 부인은 침착한 모양을 보이려고 빙그레 웃었으나, 그것은 실패였다. "그게 참말일까요? 정임이가 아기를 뗀 것이 아니라, 폐가 나빠서 피를 토하고 입원하였다는 것이?" 하고 부인은 중대하다는 표정을 가지고 묻는다. "그럼 그것이 참말이 아니구요. 아직도 그런 의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정임이와 한 방에 있는 학생이 모함한 것이라고 안 그랬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고 언성을 높여서 대답하였다. "그럼 왜 정임이가 호텔에서 왜 아버지한테 한 번 안아 달라고 그래요? 그 편지에 쓴 대로 한 번 안아만 보았을까요?" 이것은 부인의 둘째 물음이었다. "나는 그뿐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깨끗하다는 표라고 믿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딱하다는 표정을 하였다. "글쎄요." 하고 부인은 한참이나 생각하고 있다가, "정말 애 아버지가 혼자 달아났을까요? 정임이를 데리고 가케오치한 것이 아닐까요? 꼭 그랬을 것만 같은데." 하고 부인은 괴로운 표정을 감추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나는 남편에게 대한 아내의 의심이 어떻게 깊은가에 아니 놀랄 수가 없어서, "허." 하고 한 마디 웃고,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부부 생활을 하시고도 그렇게 노석의 인격을 몰라 주십니까. 나는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부러 하시는 농담으로밖에 아니 들립니다. 정임이가 지금 서울 있습니다." 하고 또 한 번 웃었다. 정말 기막힌 웃음이었다. "정임이가 서울 있어요?" 하고 부인은 펄쩍 뛰면서, "어디 있다가 언제 왔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의아한 빛을 보인다. 꼭 최석이하고 함께 달아났을 정임이가 서울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동경서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서 순임이허구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뵈오러 올 것입니다." 하고 나는 정임이가 분명히 서울 있는 것을 일일이 증거를 들어서 증명하였다. 그리고 우스운 것을 속으로 참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 병들고 늙은 아내의 질투와 의심으로 괴로워서 덜덜덜덜 떨고 앉았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였다. 정임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임이 판명되매, 부인은 도리어 낙망하는 듯하였다. 그가 제 마음대로 그려 놓고 믿고 하던 모든 철학의 계통이 무너진 것이었다. 한참이나 흩어진 정신을 못 수습하는 듯이 앉아 있더니 아주 기운 없는 어조로, "선생님 애 아버지가 정말 죽을까요? 정말 영영 집에를 안 돌아올까요?" 하고 묻는다. 그 눈에는 벌써 눈물이 어리었다. "글쎄요. 내 생각 같아서는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또 그만치 망신을 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돌아옵니까. 내라도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은 아니 내겠습니다." 하고 나는 의식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부인의 가슴에 칼을 하나 박았다. 그 칼은 분명히 부인의 가슴에 아프게 박힌 모양이었다. "선생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애 아버지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순임이년이 제가 걔 아버지를 달아나게나 한 것처럼 원망을 하는데요. 그러다가 정녕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일 딴 자식들의 원망을 들을까봐 겁이 납니다. 선생님, 어떻게 애 아버지를 붙들어다 주세요." 하고 마침내 참을 수 없이 울었다. 말은 비록 자식들의 원망이 두렵다고 하지마는 질투의 감정이 스러질 때에 그에게는 남편에게 대한 아내의 애정이 막혔던 물과 같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였다. "글쎄,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습니까. 노석의 성미에 한번 아니 한다고 했으면 다시 편지할 리는 만무하다고 믿습니다." 하여 나는 부인의 가슴에 둘째 칼날을 박았다. 나는 비록 최석의 부인이 청하지 아니하더라도 최석을 찾으러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의무를 진다. 산 최석을 못 찾더라도 최석의 시체라도, 무덤이라도, 죽은 자리라도, 마지막 있던 곳이라도 찾아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의무를 깨닫는다. 그러나 시국이 변하여 그 때에는 아라사에 가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에는 북만의 풍운이 급박하여 만주리를 통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점산(馬占山) 일파의 군대가 흥안령, 하일라르 등지에 웅거하여 언제 대충돌이 폭발될는지 모르던 때였다. 이 때문에 시베리아에 들어가기는 거의 절망 상태라고 하겠고, 또 관헌도 아라사에 들어가는 여행권을 잘 교부할 것 같지 아니하였다. 부인은 울고,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고 있는 동안에 문 밖에는 순임이, 정임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정임이냐." 하고 부인은 반갑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정임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자 앉아라. 그래 인제 병이 좀 나으냐…… 수척했구나. 더 노성해지구 반 년도 못 되었는데." 하고 정임에게 대하여 애정을 표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의외지마는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정임이가 오면 보기 싫은 한 신을 연출하지 않나 하고 근심하였던 것이다. "희 잘 자라요?" 하고 정임은 한참이나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응, 잘 있단다. 컸나 가 보아라." 하고 부인은 더욱 반가운 표정을 보인다. "어느 방이야?" 하고 정임은 선물 보퉁이를 들고 순임과 함께 나가 버린다. 여자인 정임은 희와 순임과 부인과 또 순임의 다른 동생에게 선물 사 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정임과 순임은 한 이삼 분 있다가 돌아왔다. 밖에서 희가 무엇이라고 지절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정임이가 사다 준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양이다. 정임은 들고 온 보퉁이에서 여자용 배스로브 하나를 내어서 부인에게주며, "맞으실까?" 하였다. "아이 그건 무어라고 사 왔니?" 하고 부인은 좋아라고 입어 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면서, "난 이런 거 처음 입어 본다." 하고 자꾸 끈을 동여맨다. "정임이가 난 파자마를 사다 주었어." 하고 순임은 따로 쌌던 굵은 줄 있는 융 파자마를 내어서 경매장 사람 모양으로 흔들어 보이며, "어머니 그 배스로브 나 주우. 어머닌 늙은이가 그건 입어서 무엇 하우?" 하고 부인이 입은 배스로브를 벗겨서 제가 입고 두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기죽어기죽하고 서양 부인네 흉내를 낸다. "저런 말괄량이가 너도 정임이처럼 좀 얌전해 보아라." 하고 부인은 순임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이 모양으로 부인과 정임과의 대면은 가장 원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은 정임에게 최석의 편지를 보이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편지가 왔다는 말조차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순임이가 정임에게 대하여 표하는 애정은 여간 깊지 아니하였다. 그 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정임은 그 날 저녁에 나를 보고, "순임이헌테 최 선생님 편지 사연은 다 들었어요. 순임이가 그 편지를 훔쳐다가 얼른얼른 몇 군데 읽어도 보았습니다. 순임이가 저를 퍽 동정하면서 절더러 최 선생을 따라가 보라고 그래요. 혼자 가기가 어려우면 자기허구 같이 가자고. 가서 최 선생을 데리고 오자고. 어머니가 못 가게 하거든 몰래 둘이 도망해 가자고. 그래서 그러자고 그랬습니다. 안됐지요. 선생님?" 하고 저희끼리 작정은 다 해 놓고는 슬쩍 내 의향을 물었다. "젊은 여자 단둘이서 먼 여행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게다가 지금 북만주 형세가 대단히 위급한 모양인데. 또 정임이는 그 건강 가지고 어디를 가, 이 추운 겨울에?" 하고 나는 이런 말이 다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른으로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어서 하였다. 정임은 더 제 뜻을 주장하지도 아니하였다. 그 날 저녁에 정임은 순임의 집에서 잤는지 집에 오지를 아니하였다. 나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이 두 여자의 행동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혼자 끙끙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궁금해서 최석의 집에를 갔더니 부인이, "우리 순임이 댁에 갔어요?" 하고 의외의 질문을 하였다. "아니오." 하고 나는 놀랐다. "그럼, 이것들이 어딜 갔어요? 난 정임이허구 댁에서 잔 줄만 알았는데." 하고 부인은 무슨 불길한 것이나 본 듯이 몸을 떤다. 히스테리가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었다. 분명히 이 두 여자가 시베리아를 향하고 떠났구나 하였다. 그 날은 소식이 없이 지났다. 그 이튿날도 소식이 없이 지났다. 최석 부인은 딸까지 잃어버리고 미친 듯이 울고 애통하다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버리고 말았다. 정임이와 순임이가 없어진 지 사흘 만에 아침 우편에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봉투는 봉천 야마도 호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 선생님! 저는 아버지를 위하여, 정임을 위하여 정임과 같이 집을 떠났습니다. 어머님께서 슬퍼하실 줄은 알지마는 저희들이 다행히 아버지를 찾아서 모시고 오면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희들이 가지 아니하고는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실 것 같지 아니합니다. 아버지를 이처럼 불행하시게 한 죄는 절반은 어머니께 있고, 절반은 제게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이가 갈립니다. 저는 아무리 해서라도 아버지를 찾아내어야겠습니다. 저는 정임을 무한히 동정합니다. 저는 어려서 정임을 미워하고 아버지를 미워하였지마는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과 정임의 마음을 알아볼 만치 자랐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둘이 손을 잡고 어디를 가서든지 아버지를 찾아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낮에는 구름이 되고 밤에는 별이 되어서 반드시 저희들의 앞길을 인도할 줄 믿습니다. 선생님, 저희 어린것들의 뜻을 불쌍히 여기셔서 돈 천 원만 전보로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만주리로 가는 길이 끊어지면 몽고로 자동차로라도 가려고 합니다. 아버지 편지에 적힌 F역의 R씨를 찾고, 그리고 바이칼 호반의 바이칼리스코에를 찾아, 이 모양으로 찾으면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 내고야 말 것을 믿습니다. 선생님, 돈 천 원만 봉천 야마도 호텔 최순임 이름으로 부쳐 주세요. 그리고 어머니헌테는 아직 말씀 말아 주세요. 선생님. 이렇게 걱정하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순임 상서 이렇게 써 있다. 또 한 장에는, 선생님! 저는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나이다. 어디든지 최 선생님을 뵈옵는 곳에서 이 몸을 묻어 버리려 하나이다. 지금 또 몸에 열이 나는 모양이요, 혈담도 보이오나 최 선생을 뵈올 때까지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목숨을 부지하려 하오며, 최 선생을 뵈옵고 제가 진 은혜를 감사하는 한 말씀만 사뢰면 고대 죽사와도 여한이 없을까 하나이다. 순임 언니가 제게 주시는 사랑과 동정은 오직 눈물과 감격밖에 더 표할 말씀이 없나이다. 순임 언니가 저를 보호하여 주니 마음이 든든하여이다……. 이라고 하였다. 편지를 보아야 별로 놀랄 것은 없었다. 다만 말괄량이로만 알았던 순임의 속에 어느새에 그러한 감정이 발달하였나 하는 것을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이것이다. 순임이나 정임이나 다 내가 감독해야 할 처지에 있거늘 그들이 만리 긴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감독자인 내 태도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다. 나는 편지를 받는 길로 우선 돈 천 원을 은행에 가서 찾아다 놓았다. 암만해도 내가 서울에 가만히 앉아서 두 아이에게 돈만 부쳐 주는 것이 인정에 어그러지는 것 같아서 나는 여러 가지로 주선을 하여서 여행의 양해를 얻어 가지고 봉천을 향하여 떠났다. 내가 봉천에 도착한 것은 밤 열시가 지나서였다. 순임과 정임은 자리옷 바람으로 내 방으로 달려와서 반가워하였다. 그들이 반가워하는 양은 실로 눈물이 흐를 만하였다. "아이구 선생님!" "아이구 어쩌면!" 하는 것이 그들의 내게 대한 인사의 전부였다. "정임이 어떠오?" 하고 나는 순임의 편지에 정임이가 열이 있단 말을 생각하였다. "무어요. 괜찮습니다." 하고 정임은 웃었다. 전등빛에 보이는 정임의 얼굴은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깎은 듯하였다. 여위고 핏기가 없는 것이 더욱 정임의 용모에 엄숙한 맛을 주었다. "돈 가져오셨어요?" 하고 순임이가 어리광 절반으로 묻다가 내가 웃고 대답이 없음을 보고, "우리를 붙들러 오셨어요?" 하고 성내는 양을 보인다. "그래 둘이서들 간다니 어떻게 간단 말인가. 시베리아가 어떤 곳에 붙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하고 나는 두 사람이 그리 슬퍼하지 아니하는 순간을 보는 것이 다행하여서 농담삼아 물었다. "왜 몰라요? 시베리아가 저기 아니야요?" 하고 순임이가 산해관 쪽을 가리키며, "우리도 지리에서 배워서 다 알아요. 어저께 하루 종일 지도를 사다 놓고 연구를 하였답니다. 봉천서 신경, 신경서 하얼빈, 하얼빈에서 만주리, 만주리에서 이르쿠츠크, 보세요, 잘 알지 않습니까. 또 만일 중동 철도가 불통이면 어떻게 가는고 하니 여기서 산해관을 가고, 산해관서 북경을 가지요. 그리고는 북경서 장가구를 가지 않습니까. 장가구서 자동차를 타고 몽고를 통과해서 가거든요. 잘 알지 않습니까." 하고 정임의 허리를 안으며, "그렇지이?" 하고 자신 있는 듯이 웃는다. "또 몽고로도 못 가게 되어서 구라파를 돌게 되면?" 하고 나는 교사가 생도에게 묻는 모양으로 물었다. "네, 저 인도양으로 해서 지중해로 해서 프랑스로 해서 그렇게 가지요." "허, 잘 아는구나." 하고 나는 웃었다. "그렇게만 알아요? 또 해삼위로 해서 가는 길도 알아요. 저희를 어린애로 아시네." "잘못했소." "하하." "후후." 사실 그들은 벌써 어린애들은 아니었다. 순임도 벌써 그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사정에 동정할 나이가 되었다. 순임이가 기어다닌 것은 본 나로는 이것도 이상하게 보였다. 나는 벌써 나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잠 안 드는 하룻밤을 지내면서 옆방에서 정임이가 기침을 짓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이튿날 나는 두 사람에게 돈 천 원을 주어서 신경 가는 급행차를 태워 주었다. 대륙의 이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 정임의 병든 폐가 견디어 날까 하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가라고 권할 수는 있어도 가지 말라고 붙들 수는 없었다. 다만 제 아버지, 제 애인을 죽기 전에 만날 수 있기만 빌 뿐이었다. 나는 두 아이를 북쪽으로 떠나 보내고 혼자 여관에 들어와서 도무지 정신을 진정하지 못하여 술을 먹고 잊으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 날 밤차로 서울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최석 부인을 찾아서 순임과 정임이가 시베리아로 갔단 말을 전하였다. 그 때에 최 부인은 거의 아무 정신이 없는 듯하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울고만 있었다. 얼마 있다가 부인은, "그것들이 저희들끼리 가서 괜찮을까요?" 하는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며칠 후에 순임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것은 하얼빈에서 부친 것이었다. 하얼빈을 오늘 떠납니다. 하얼빈에 와서 아버지 친구 되시는 R소장을 만나뵈옵고 아버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이서 찾아 떠났다는 말씀을 하였더니 R소장이 대단히 동정하여서 여행권도 준비해 주시기로 저희는 아버지를 찾아서 오늘 오후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떠납니다. 가다가 F역에 내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임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합니다. 일기가 갑자기 추워지는 관계인지 정임의 신열이 오후면 삼십팔 도를 넘고 기침도 대단합니다. 저는 염려가 되어서 정임더러 하얼빈에서 입원하여 조리를 하라고 권하였지마는 도무지 듣지를 아니합니다. 어디까지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더 못 가게 되면 그 곳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며칠 정임과 같이 있는 중에 정임이가 어떻게 아름답고 높고 굳세게 깨끗한 여자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임을 몰라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제 아버지께서 어떻게 갸륵한 어른이신 것을 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식 된 저까지도 아버지와 정임과의 관계를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임을 만나 보고 정임의 말을 듣고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드린 편지가 모두 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친구의 의지 없는 딸인 정임을 당신의 친혈육인 저와 꼭 같이 사랑하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갸륵한 일입니까. 그런데 제 어머니와 저는 그 갸륵하신 정신을 몰라보고 오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질투하시고 저는 시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버지를 그렇게 갸륵하신 아버지를 몰라뵈온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원통한 일입니까. 선생님께서도 여러 번 아버지의 인격이 높다는 것을 저희 모녀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는 마음이 막힌 저는 선생님의 말씀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님, 정임은 참으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정임에게는 이 세상에 아버지밖에는 사랑하는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외●으로, 그렇게 열렬하게 아버지를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잘 압니다. 정임이가 처음에는 아버지로 사랑하였던 것을, 그러나 어느 새에 정임의 아버지에게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사랑으로 변한 것을, 그것이 연애냐 하고 물으면 정임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정임의 그 대답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정임은 숙성하지마는 아직도 극히 순결합니다. 정임은 부모를 잃은 후에 아버지밖에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버지에게밖에 사랑받던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정임은 아버지를 그저 사랑합니다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선생님, 정임의 사랑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 사내 친구에 대한 여자 친구의 사랑, 애인에 대한 애인의 사랑, 이 밖에 존경하고 숭배하는 선생에 대한 제자의 사랑까지, 사랑의 모든 종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저는 발견하였습니다. 선생님, 정임의 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근심하는 양은 제 몇십 배나 되는지 모르게 간절합니다. 정임은 저 때문에 아버지가 불행하게 되셨다고 해서 차마 볼 수 없게 애통하고 있습니다. 진정을 말씀하오면 저는 지금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정임에게 가장 동정이 끌립니다. 선생님, 저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임을 돕기 위하여 간호하기 위하여 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정임을 보고 사랑이란 것이 어떻게 신비하고 열렬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안 것 같습니다. 순임의 편지는 계속된다. 선생님, 하얼빈에 오는 길에 송화강 굽이를 볼 때에는 정임이가 어떻게나 울었는지, 그것은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송화강을 보시고 감상이 깊으셨더란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무인지경으로, 허옇게 눈이 덮인 벌판으로 흘러가는 송화강 굽이, 그것은 슬픈 풍경입니다. 아버지께서 여기를 지나실 때에는 마른 풀만 있는 광야였을 것이니 그 때에는 더욱 황량하였을 것이라고 정임은 말하고 웁니다. 정임은 제가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 아버지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아버지와는 그리 접촉이 없건마는 정임은 아버지의 의지력, 아버지의 숨은 열정, 아버지의 성미까지 잘 압니다. 저는 정임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참 그래, 하는 감탄을 발한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정임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아버지가 남보다 뛰어나신 인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정의감이 굳세고 겉으로는 싸늘하도록 이지적이지마는 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있으시고, 아버지는 쇠 같은 의지력과 칼날 같은 판단력이 있어서 언제나 주저하심이 없고 또 흔들리심이 없다는 것,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호의로 해석하여서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심이 없는 등, 정임은 아버지의 마음의 목록과 설명서를 따로 외우는 것처럼 아버지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듣고 보아서 비로소 아버지의 딸인 저는 내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가를 알았습니다. 선생님, 이해가 사랑을 낳는단 말씀이 있지마는 저는 정임을 보아서 사랑이 이해를 낳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어머니와 저는 평생을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몰랐습니까. 이성이 무디고 양심이 흐려서 그랬습니까. 정임은 진실로 존경할 여자입니다. 제가 남자라 하더라도 정임을 아니 사랑하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정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친구의 딸로, 다음에는 친딸과 같이, 또 다음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뜨거운 사랑이 생겼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아버지는 죽인 것입니다. 그것을 죽이려고 이 달할 수 없는 사랑을 죽이려고 시베리아로 달아나신 것입니다. 인제야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하신 편지의 뜻이 알아진 것 같습니다. 백설이 덮인 시베리아의 삼림 속으로 혼자 헤매며 정임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죽이려고 무진 애를 쓰시는 그 심정이 알아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저는 정임의 짐에 지니고 온 일기를 보다가 이러한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인트 오거스틴의 <참회록>을 절반이나 다 보고 나도 잠이 들지 아니합니다. 잠이 들기 전에 제가 항상 즐겨하는 아베마리아의 노래를 유성기로 듣고 나서 오늘 일기를 쓰려고 하니 슬픈 소리만 나옵니다. 사랑하는 어른이여. 저는 멀리서 당신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만 살아야 할 것을 잘 압니다. 여기에서 영원한 정지를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비록 제 생명이 괴로움으로 끊어지고 제 혼이 피어 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리더라도 저는 이 멀리서 바라보는 존경과 신뢰의 심경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지 않아야 할 것을 잘 압니다. 나를 위하여 놓여진 생의 궤도는 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억지의 길입니다. 제가 몇 년 전 기숙사 베드에서 이런 밤에 내다보면 즐겁고 아름답던 내 생의 꿈은 다 깨어졌습니다. 제 영혼의 한 조각이 먼 세상 알지 못할 세계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마음 조각 어찌하다가 제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피어 오르는 생명의 광채를 스스로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때 어찌 슬픔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현실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아니오리까. 나의 세계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발견한 빛을 어둠 속에 소멸해 버리라는 이 일이 얼마나 떨리는 직무오리까. 이 허깨비의 형의 사람이 살기 위하여 내 손으로 칼을 들어 내 영혼의 환희를 쳐야 옳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얼마나 피 흐르는 고백입니까. 선생님, 저는 정임의 이 고백을 보고 무조건으로 정임의 사랑을 시인합니다. 선생님, 제 목숨을 바쳐서 하는 일에 누가 시비를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동기에 티끌만큼도 불순한 것이 없음에야 무조건으로 시인하지 아니하고 어찌합니까. 바라기는 정임의 병이 크게 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무사히 계셔서 속히 만나뵙게 되는 것입니다마는 앞길이 망망하여 가슴이 두근거림을 금치 못합니다. 게다가 오늘은 함박눈이 퍼부어서 천지가 온통 회색으로 한 빛이 되었으니 더욱 전도가 막막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앓는 정임을 데리고 용감하게 시베리아 길을 떠납니다. 한 일 주일 후에 또 편지 한 장이 왔다. 그것도 순임의 편지여서 이러한 말이 있었다. ……오늘 새벽에 흥안령을 지났습니다. 플랫폼의 한란계는 영하 이십삼 도를 가리켰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솜털에 성에가 슬어서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하얗게 분을 바른 것 같습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도 그와 같이 흰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코털이 얼어서 숨이 끊기고 바람결이 지나가면 눈물이 얼어서 눈썹이 마주 붙습니다. 사람들은 털과 가죽에 싸여서 곰같이 보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었다. 아라사 계집애들이 우유병들을 품에 품고 서서 손님이 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두 병을 사서 정임이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우유는 따뜻합니다. 그것을 식히지 아니할 양으로 품에 품고 섰던 것입니다. 또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정거장에 닿을 때마다 저희들은 밖을 내다봅니다. 행여나 아버지가 거기 계시지나 아니할까 하고요. 차가 어길 때에는 더구나 마음이 조입니다. 아버지가 그 차를 타고 지나가시지나 아니하는가 하고요. 그리고는 정임은 웁니다. 꼭 뵈올 어른을 놓쳐나 버린 듯이. 그리고는 이 주일 동안이나 소식이 없다가 편지 한 장이 왔다. 그것은 정임의 글씨였다. 선생님, 저는 지금 최 선생께서 계시던 바이칼 호반의 그 집에 와서 홀로 누웠습니다. 순임은 주인 노파와 함께 F역으로 최 선생을 찾아서 오늘 아침에 떠나고 병든 저만 혼자 누워서 얼음에 싸인 바이칼 호의 눈보라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열은 삼십팔 도로부터 구 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기침은 나고 몸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 저는 하나님을 불러서 축원합니다. 이 실낱 같은 생명이 다 타 버리기 전에 최 선생의 낯을 다만 일 초 동안이라도 보여지이라고. 그러하오나 선생님, 이 축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한사코 F역까지 가려 하였사오나 순임 형이 울고 막사오며 또 주인 노파가 본래 미국 사람과 살던 사람으로 영어를 알아서 순임 형의 도움이 되겠기로 저는 이 곳에 누워 있습니다. 순임 형은 기어코 아버지를 찾아 모시고 오마고 약속하였사오나 이 넓은 시베리아에서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선생님, 저는 죽음을 봅니다. 죽음이 바로 제 앞에 와서 선 것을 봅니다. 그의 손은 제 여윈 손을 잡으려고 들먹거림을 봅니다. 선생님, 죽은 뒤에도 의식이 남습니까. 만일 의식이 남는다 하면 죽은 뒤에도 이 아픔과 괴로움을 계속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까. 죽은 뒤에는 오직 영원한 어둠과 잊어버림이 있습니까. 죽은 뒤에는 혹시나 생전에 먹었던 마음을 자유로 펼 도리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립고 사모하던 이를 죽은 뒤에는 자유로 만나 보고 언제나 마음껏 같이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일도 있습니까. 이런 일을 바라는 것도 죄가 됩니까. 정임의 편지는 더욱 절망적인 어조로 찬다. 저는 처음 병이 났을 때에는 죽는 것이 싫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아니합니다. 다만 차마 죽지 못하는 것이 한. 하고는 `다만 차마' 이하를 박박 지워 버렸다. 그리고는 새로 시작하여 나와내 가족에게 대한 문안을 하고는 끝을 막았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무슨 큰 비극이 가까운 것을 예상하게 하였다. 그 후 한 십여 일이나 지나서 전보가 왔다. 그것은 영문으로 씌었는데, "아버지 병이 급하다. 나로는 어쩔 수 없다. 돈 가지고 곧 오기를 바란다." 하고 그 끝에 B호텔이라고 주소를 적었다. 전보 발신국이 이르쿠츠크인 것을 보니 B호텔이라 함은 이르쿠츠크인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최석 부인에게 최석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곧 여행권 수속을 하였다. 절망으로 알았던 여행권은 사정이 사정인만큼 곧 발부되었다. 나는 비행기로 여의도를 떠났다. 백설에 개개한 땅을, 남빛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는 동안에 대련을 들러 거기서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봉천, 신경, 하얼빈을 거쳐, 치치하얼에 들렀다가 만주리로 급행하였다. 웅대한 대륙의 설경도 나에게 아무러한 인상도 주지 못하였다. 다만 푸른 하늘과 희고 평평한 땅과의 사이로 한량 없이 허공을 날아간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두 친구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아무 여유도 없는 까닭이었다. 만주리에서도 비행기를 타려 하였으나 소비에트 관헌이 허락을 아니 하여 열차로 갈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몇 밤을 지나고 이르쿠츠크에 내린 것이 오전 두시. 나는 B호텔로 이스보스치카라는 마차를 몰았다. 죽음과 같이 고요하게 눈 속에 자는 시간에는 여기저기 전등이 반짝거릴 뿐, 이따금 밤의 시가를 경계하는 병정들의 눈이 무섭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B호텔에서 미스 초이(최 양)를 찾았으나 순임은 없고 어떤 서양 노파가 나와서, "유 미스터 Y?" 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다는 내 대답을 듣고는 노파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넉넉하지 못한 영어로 그 노파에게서 최석이가 아직 살았다는 말과 정임의 소식은 들은 지 오래라는 말과 최석과 순임은 여기서 삼십 마일이나 떨어진 F역에서도 썰매로 더 가는 삼림 속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밤을 여기서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는 완행차로 그 노파와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이 날도 천지는 오직 눈뿐이었다. 차는 가끔 삼림 중으로 가는 모양이나 모두 회색빛에 가리워서 분명히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F역이라는 것은 삼림 속에 있는 조그마한 정거장으로 집이라고는 정거장 집밖에 없었다. 역부 두엇이 털옷에 하얗게 눈을 뒤쓰고 졸리는 듯이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우리는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어디가 길인지 분명치도 아니한 눈 속으로 말을 몰았다. 바람은 없는 듯하지마는 그래도 눈발을 한편으로 비끼는 모양이어서 아름드리 나무들의 한쪽은 하얗게 눈으로 쌓이고 한쪽은 검은 빛이 더욱 돋보였다. 백 척은 넘을 듯한 꼿꼿한 침엽수(전나무 따윈가)들이 어디까지든지, 하늘에서 곧 내려박은 못 모양으로, 수없이 서 있는 사이로 우리 썰매는 간다. 땅에 덮인 눈은 새로 피워 놓은 솜같이 희지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구름빛과 공기빛과 어울려서 밥 잦힐 때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이 연회색이다. 바람도 불지 아니하고 새도 날지 아니하건마는 나무 높은 가지에 쌓인 눈이 이따금 덩치로 떨어져서는 고요한 수풀 속에 작은 동요를 일으킨다. 우리 썰매가 가는 길이 자연스러운 복잡한 커브를 도는 것을 보면 필시 얼음 언 개천 위로 달리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이나 달린 뒤에 우리 썰매는 늦은 경사지를 올랐다. 말을 어거하는 아라사 사람은 쭈쭈쭈쭈, 후르르 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입으로 말을 재촉하고 고삐를 이리 들고 저리 들어 말에게 방향을 가리킬 뿐이요, 채찍은 보이기만하고 한 번도 쓰지 아니하였다. 그와 말과는 완전히 뜻과 정이 맞는 동지인 듯하였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차차 추워짐을 깨달았다. 발과 무르팍이 시렸다. "얼마나 머오?" 하고 나는 오래간만에 입을 열어서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털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깊숙한 눈만 남겨 가지고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묻는 말에 비로소 잠이나 깬 듯이, "멀지 않소. 인젠 한 십오 마일."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아마 웃는 모양이었다. 그 얼굴, 그 눈, 그 음성이 모두 이 노파가 인생 풍파의 슬픈 일 괴로운 일에 부대끼고 지친 것을 표하였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살아간다 하는 듯하였다. 경사지를 올라서서 보니 그것은 한 산등성이였다.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가는 방향에는 더 높은 등성이가 있는 모양이나 다른 곳은 다 이보다 낮은 것 같아서 하얀 눈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 눈보라는 들쑹날쑹이 있는 것을 보면 삼림의 꼭대기인 것이 분명하였다. 더구나 여기저기 뾰족뾰족 눈송이 붙을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가 거뭇거뭇 보이는 것을 보아서 그러하였다. 만일 눈이 걷혀 주었으면 얼마나 안계가 넓으랴, 최석 군이 고민하는 가슴을 안고 이리로 헤매었구나 하면서 나는 목을 둘러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 등성이를 내려갔다. 말이 미처 발을 땅에 놓을 수가 없는 정도로 빨리 내려갔다. 여기는 산불이 났던 자리인 듯하여 거뭇거뭇 불탄 자국 있는 마른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찍어 가는 사람도 없으매 저절로 썩어서 없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서 아주 썩어 버리기까지 천 년 이상은 걸린다고 하니 또한 장한 일이다. 이 대삼림에 불이 붙는다 하면 그것은 장관일 것이다. 달밤에 높은 곳에서 이 경치를 내려다본다 하면 그도 장관일 것이요, 여름에 한창 기운을 펼 때도 장관일 것이다. 나는 오뉴월경에 시베리아를 여행하는 이들이 끝없는 꽃바다를 보았다는 기록을 생각하였다. "저기요!" 하는 노파의 말에 나는 생각의 줄을 끊었다. 저기라고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는 집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창이 있으니 분명 집이었다. 우리 이스보스치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는지, 그 집 같은 물건의 문 같은 것이 열리며 검은 외투 입은 여자 하나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뛰어나온다. 아마 소리도 치는 모양이겠지마는 그 소리는 아니 들렸다. 나는 그것이 순임인 줄을 얼른 알았다. 또 순임이밖에 될 사람도 없었다. 순임은 한참 달음박질로 오다가 눈이 깊어서 걸음을 걷기가 힘이 드는지 멈칫 섰다. 그의 검은 외투는 어느덧 흰 점으로 얼려져 가지고 어깨는 희게 되는 것이 보였다. 순임의 갸름한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 하고 순임도 나를 알아보고는 또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나도 반가워서 모자를 벗어 둘렀다. "아이 선생님!" 하고 순임은 내가 썰매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내게 와서 매달리며 울었다. "아버지 어떠시냐?" 하고 나는 순임의 등을 두드렸다. 나는 다리가 마비가 되어서 곧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버지 어떠시냐?" 하고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순임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쳐내 버리며, "대단하셔요." 하고도 울음을 금치 못하였다. 노파는 벌써 썰매에서 내려서 기운 없는 걸음으로 비틀비틀 걷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순임을 따라서 언덕을 오르며, "그래 무슨 병환이시냐?" 하고 물었다. "몰라요. 신열이 대단하셔요." "정신은 차리시든?" "처음 제가 여기 왔을 적에는 그렇지 않더니 요새에는 가끔 혼수 상태에 빠지시는 모양이야요." 이만한 지식을 가지고 나는 최석이가 누워 있는 집 앞에 다다랐다. 이 집은 통나무를 댓 개 우물 정자로 가로놓고 지붕은 무엇으로 했는지 모르나 눈이 덮이고, 문 하나 창 하나를 내었는데 문은 나무껍질인 모양이나 창은 젖빛 나는 유리창인 줄 알았더니 뒤에 알아본즉 그것은 유리가 아니요, 양목을 바르고 물을 뿜어서 얼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통나무와 통나무 틈바구니에는 쇠털과 같은 마른 풀을 꼭꼭 박아서 바람을 막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엌에 들어서는 모양으로 쑥 빠졌는데 화끈화끈하는 것이 한증과 같다. 그렇지 않아도 침침한 날에 언 눈으로 광선 부족한 방에 들어오니, 캄캄 절벽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순임이가 앞서서 양초에 불을 켠다. 촛불 빛은 방 한편 쪽 침대라고 할 만한 높은 곳에 담요를 덮고 누운 최석의 시체와 같은 흰 얼굴을 비춘다. "아버지, 아버지 샌전 아저씨 오셨어요." 하고 순임은 최석의 귀에 입을 대고 가만히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최석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축축하게 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리 더운 줄은 몰랐다. 방 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하였다. 그 난방 장치는 삼굿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돌멩이로 아궁이를 쌓고 그 위에 큰 돌멩이들을 많이 쌓고 거기다가 불을 때어서 달게 한 뒤에 거기 눈을 부어 뜨거운 증기를 발하는 것이었다. 이 건축법은 조선 동포들이 시베리아로 금광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법이란 말을 들었으나 최석이가 누구에게서 배워 가지고 어떤 모양으로 지었는지는 최석의 말을 듣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최석의 병 치료에 대한 손을 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르쿠츠크의 병원으로 최석을 데려다가 입원시킬 도리를 궁리하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최석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간 지 사흘 만에 최석은 처음으로 정신을 차려서 눈을 뜨고 나를 알아보았다. 그는 반가운 표정을 하고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다 일없나?" 이런 말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심히 기운이 없는 모양이기로 나는 많이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최석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더니, "정임이 소식 들었나?" 하였다. "괜찮대요." 하고 곁에서 순임이가 말하였다. 그리고는 또 혼몽하는 듯하였다. 그 날 또 한 번 최석은 정신을 차리고 순임더러는 저리로 가라는 뜻을 표하고 나더러 귀를 가까이 대라는 뜻을 보이기로 그대로 하였더니, "내 가방 속에 일기가 있으니 그걸 자네만 보고는 불살라 버려. 내가 죽은 뒤에라도 그것이 세상 사람의 눈에 들면 안 되지. 순임이가 볼까 걱정이 되지마는 내가 몸을 꼼짝할 수가 있나." 하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지."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난 뒤에 나는 최석이가 시킨 대로 가방을 열고 책들을 뒤져서 그 일기책이라는 공책을 꺼내었다. "순임이 너 이거 보았니?" 하고 나는 곁에서 내가 책 찾는 것을 보고 섰던 순임에게 물었다. "아니오. 그게 무어여요?" 하고 순임은 내 손에 든 책을 빼앗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순임의 손이 닿지 않도록 책을 한편으로 비키며, "이것이 네 아버지 일기인 모양인데 너는 보이지 말고 나만 보라고 하셨다. 네 아버지가 네가 이것을 보았을까 해서 염려를 하시는데 안 보았으면 다행이다." 하고 나는 그 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다. 해는 중천에 있다. 중천이래야 저 남쪽 지평선 가까운 데다. 밤이 열여덟 시간, 낮이 대여섯 시간밖에 안 되는 북쪽 나라다. 멀건 햇빛이다. 나는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최석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였다. 읽은 중에서 몇 구절을 골라 볼까. "집이 다 되었다. 이 집은 내가 생전 살고 그 속에서 이 세상을 마칠 집이다. 마음이 기쁘다. 시끄러운 세상은 여기서 멀지 아니하냐. 내가 여기 홀로 있기로 누가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기로 누가 슬퍼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때로 곰이나 찾아올까. 지나가던 사슴이나 들여다볼까. 이것이 내 소원이 아니냐. 세상의 시끄러움을 떠나는 것이 내 소원이 아니냐. 이 속에서 나는 나를 이기기를 공부하자." 첫날은 이런 평범한 소리를 썼다. 그 이튿날에는. "어떻게나 나는 약한 사람인고. 제 마음을 제가 지배하지 못하는 사람인고. 밤새도록 나는 정임을 생각하였다. 어두운 허공을 향하여 정임을 불렀다. 정임이가 나를 찾아서 동경을 떠나서 이리로 오지나 아니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어떻게나 부끄러운 일인고? 어떻게나 가증한 일인고? 나는 아내를 생각하려 하였다. 아이들을 생각하려 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함으로 정임의 생각을 이기려 하였다. 최석아, 너는 남편이 아니냐. 아버지가 아니냐. 정임은 네 딸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정임의 일류전은 아내와 아이들의 생각을 밀치고 달려오는 절대 위력을 가진 듯하였다. 아, 나는 어떻게나 파렴치한 사람인고. 나이 사십이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놈이 아니냐. 사십에 불혹이라고 아니 하느냐. 교육가로 깨끗한 교인으로 일생을 살아 왔다고 자처하는 내가 아니냐 하고 나는 내 입으로 내 손가락을 물어서 두 군데나 피를 내었다." 최석의 둘째 날 일기는 계속된다. "내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에 나는 유쾌하였다. 나는 승첩의 기쁨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그 빨간, 참회의 핏방울 속에서도 애욕의 불길이 일지 아니하는가. 나는 마침내 제도할 수 없는 인생인가." 이 집에 든 지 둘째날에 벌써 이러한 비관적 말을 하였다. 또 며칠을 지난 뒤 일기에, "나는 동경으로 돌아가고 싶다. 정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시베리아의광야의 유혹도 아무 힘이 없다. 어젯밤은 삼림의 좋은 달을 보았으나 그 달을 아름답게 보려 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아름답게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하늘이나 달이나 삼림이나 모두 무의미한 존재다. 이처럼 무의미한 존재를 나는 경험한 일이 없다. 그것은 다만 기쁨을 자아내지 아니할 뿐더러 슬픔도 자아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잿더미였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데서 내 진정을 말하라면 그것은 이 천지에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정임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정임의 곁에 있고 싶다. 정임을 내 곁에 두고 싶다. 왜? 그것은 나도 모른다. 만일 이 움 속에라도 정임이가 있다 하면 얼마나 이것이 즐거운 곳이 될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생각을 죽여야 한다. 다시 거두를 못 하도록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이것을 나는 원한다. 원하지마는 내게는 그 힘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종교를 생각하여 본다. 철학을 생각하여 본다. 인류를 생각하여 본다. 나라를 생각하여 본다. 이것을 가지고 내 애욕과 바꾸려고 애써 본다. 그렇지마는 내게 그러한 힘이 없다. 나는 완전히 헬플리스함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어찌할꼬?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까짓 것을 못 이겨? 그까짓 것을 못 이겨? 나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생각한다. 천하를 주마 하는 유혹을 생각한다. 나는 싯다르타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 스토아 철학자의 의지력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도 이 생각을 이길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혁명가를 생각하였다. 모든 것 사랑도 목숨도 다 헌신짝같이 집어던지고 피 흐르는 마당으로 뛰어나가는 용사를 생각하였다. 나는 이끝없는 삼림 속으로 혁명의 용사 모양으로 달음박질치다가 기운이 진한 곳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이 생각은 따르지 아니할까. 나는 지금 곧 죽어 버릴까. 나는 육혈포를 손에 들어 보았다. 이 방아쇠를 한 번만 튕기면 내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모든 이 마음의 움직임은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아 하나님이시여, 힘을 주시옵소서. 천하를 이기는 힘보다도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눈에 의롭고 깨끗한 사람으로 이 일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었다. 나를 이 비참한 자리에서 썩어져 죽게 하시었다." 최석은 어떤 날 일기에 또 이런 것도 썼다. 그것은 예전 내게 보낸 편지에 있던 꿈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러하다. "오늘 밤은 달이 좋다. 시베리아의 겨울 해는 참 못생긴 사람과도 같이 기운이 없지마는 하얀 땅, 검푸른 하늘에 저쪽 지평선을 향하고 흘러가는 반달은 참으로 맑음 그것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 시 비슷한 것을 지었다. 임과 이별하던 날 밤에는 남쪽 나라에 바람비가 쳤네 임 타신 자동차의 뒷불이 빨간 뒷불이 빗발에 찢겼네 임 떠나 혼자 헤매는 시베리아의 오늘 밤에는 지려는 쪽달이 눈 덮인 삼림에 걸렸구나 아아 저 쪽달이여 억지로 반을 갈겨진 것도 같아라 아아 저 쪽달이여 잃어진 짝을 찾아 차디찬 허공 속을 영원히 헤매는 것도 같구나 나도 저 달과 같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서 헤매는 것만 같다. 에익. 내가 왜 이리 약한가. 어찌하여 크나큰 많은 일을 돌아보지 못하고 요만한 애욕의 포로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달을 버리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센티멘털하게 되었는고. 내 쇠 같은 의지력이 어디로 갔는고. 내 누를 수 없는 자존심이 어디로 갔는고. 나는 마치 유모의 손에 달린 젖먹이와도 같다. 내 일신은 도시 애욕 덩어리로 화해 버린 것 같다. 이른바 사랑 사랑이란 말은 종교적 의미인 것 이외에도 입에 담기도 싫어하던 말이다 이런 것은 내 의지력과 자존심을 녹여 버렸는가. 또 이 부자연한 고독의 생활이 나를 이렇게 내 인격을 이렇게 파괴하였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내 자존심이라는 것이나, 의지력이라는 것이나, 인격이라는 것이 모두 세상의 습관과 사조에 휩쓸리던 것인가. 남들이 그러니까 남들이 옳다니까 남들이 무서우니까 이 애욕의 무덤에 회를 발랐던 것인가. 그러다가 고독과 반성의 기회를 얻으매 모든 회칠과 가면을 떼어 버리고 빨가벗은 애욕의 뭉텅이가 나온 것인가. 그렇다 하면, 이것이 참된 나인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대로의 나인가. 가슴에 타오르는 애욕의 불길 이 불길이 곧 내 영혼의 불길인가. 어쩌면 그 모든 높은 이상들 인류에 대한, 민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신앙에 대한 그 높은 이상들이 이렇게도 만만하게 마치 바람에 불리는 재 모양으로 자취도 없이 흩어져 버리고 말까. 그리고 그 뒤에는 평소에그렇게도 미워하고 천히 여기던 애욕의 검은 흙만 남고 말까. 아아 저 눈 덮인 땅이여, 차고 맑은 달이여, 허공이여! 나는 너희들을 부러워하노라. 불교도들의 해탈이라는 것이 이러한 애욕이 불붙는 지옥에서 눈과 같이 싸늘하고 허공과 같이 빈 곳으로 들어감을 이름인가. 석가의 팔 년 간 설산 고행이 이 애욕의 뿌리를 끊으려 함이라 하고 예수의 사십 일 광야의 고행과 겟세마네의 고민도 이 애욕의 뿌리 때문이었던가. 그러나 그것을 이기어 낸 사람이 천지 개벽 이래에 몇몇이나 되었는고? 나 같은 것이 그 중에 한 사람 되기를 바랄 수가 있을까. 나 같아서는 마침내 이 애욕의 불길에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아아 어떻게나 힘있고 무서운 불길인고." 이러한 고민의 자백도 있었다. 또 어떤 날 일기에는 최석은 이런 말을 썼다.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은,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리란 결심을 한 것을 굳세게 취소한다. 나는 이러한 결심을 하는 나 자신을 굳세게 부인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나는 정임을 시베리아로 부르련다." 또 그 다음에는, "아아 나는 하루바삐 죽어야 한다. 이 목숨을 연장하였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모른다. 나는 깨끗하게 나를 이기는 도덕적 인격으로 이 일생을 마쳐야 한다. 이 밖에 내 사업이 무엇이냐." 또 어떤 곳에는, "아아 무서운 하룻밤이었다. 나는 지난 하룻밤을 누를 수 없는 애욕의 불길에 탔다. 나는 내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나는 주먹으로 담벽을 두드려 손등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수없이 발을 굴렀다. 나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기려고 내 몸을 아프게 하였다. 나는 견디다 못하여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에는 달이 있고 눈이 있었다. 그러나 눈은 핏빛이요, 달은 찌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눈 속으로 달음박질쳤다. 달을 따라서 엎드러지며 자빠지며 달음질쳤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미친 사람 같았다." 그러고는 어디까지 갔다가 어느 때에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은 쓰이지 아니하였으나 최석의 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이것이 폐렴이 되어서 혼자 깨끗하게 이 생명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고 빈다. 나는 오늘부터 먹고 마시기를 그치련다." 이러한 말을 썼다. 그러고는, "정임, 정임, 정임, 정임." 하고 정임의 이름을 수없이 쓴 것도 있고, 어떤 데는, "Overcome, Overcome." 하고 영어로 쓴 것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죽음과 대면하였다. 사흘째 굶고 앓은 오늘에 나는 극히 맑고 침착한 정신으로 죽음과 대면하였다. 죽음은 검은 옷을 입었으나 그 얼굴에는 자비의 표정이 있었다. 죽음은 곧 검은 옷을 입은 구원의 손이었다. 죽음은 아름다운 그림자였다. 죽음은 반가운 애인이요, 결코 무서운 원수가 아니었다. 나는 죽음의 손을 잡노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품에 안기노라. 아멘." 이것을 쓴 뒤에는 다시는 일기가 없었다. 이것으로 최석이가 그 동안 지난 일을 적어도 심리적 변화만은 대강 추측할 수가 있었다. 다행히 최석의 병은 점점 돌리는 듯하였다. 열도 내리고 식은땀도 덜 흘렸다. 안 먹는다고 고집하던 음식도 먹기를 시작하였다. 정임에게로 갔던 노파에게서는 정임도 열이 내리고 일어나 앉을 만하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노파의 편지를 최석에게 읽어 주었다. 최석은 그 편지를 듣고 매우 흥분하는 모양이었으나 곧 안심하는 빛을 보였다. 나는 최석의 병이 돌리는 것을 보고 정임을 찾아볼 양으로 떠나려 하였으나 순임이가 듣지 아니하였다. 혼자서 앓는 아버지를 맡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나는 최석이가 먹을 음식도 살 겸 우편국에도 들를 겸 시가까지 가기로 하고 이 곳 온 지 일 주일이나 지나서 처음으로 산에서 나왔다. 나는 이르쿠츠크에 가서 최석을 위하여 약품과 먹을 것을 사고 또 순임을 위해서도 먹을 것과 의복과 또 하모니카와 손풍금도 사 가지고 정거장에 나와서 돌아올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후해 보이는 아라사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최석이가 병이 좀 나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또 최석과 정임의 장래가 어찌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하면서 뷔페(식당)에서 뜨거운 차이(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때에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 노파가 이리로 향하고 걸어오는 것인데 그 노파와 팔을 걸은 젊은 여자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검은 수건으로 싸매고 입과 코를 가리웠으니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혹은 정임이나 아닌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임이가 몸만 기동하게 되면 최석을 보러 올 것은 정임의 열정적인 성격으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쯤 먹던 차를 놓고 뷔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 미시즈 체스터필드?" 하고 나는 노파 앞에 손을 내어밀었다. 노파는 체스터필드라는 미국 남편의 성을 따라서 부르는 것을 기억하였다. "선생님!" 하는 것은 정임이었다. 그 소리만은 변치 아니하였다.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정임의 손을 잡았다. 나는 여러 말 아니하고 노파와 정임을 뷔페로 끌고 들어왔다. 늙은 뷔페 보이는 번쩍번쩍하는 사모바르에서 차 두 잔을 따라다가 노파와 정임의 앞에 놓았다. 노파는 어린애에게 하는 모양으로 정임의 수건을 벗겨 주었다. 그 속에서는 해쓱하게 여윈 정임의 얼굴이 나왔다. 두 볼에 불그레하게 홍훈이 도는 것도 병 때문인가. "어때? 신열은 없나?" 하고 나는 정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하고 정임은 웃으며, "최 선생님께서는 어떠세요?" 하고 묻는다. "좀 나으신 모양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 정임을 좀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 체스터필드 부인께서 아니 오시면 순임이가 혼자 있을 수가 없다고 해서, 그래 이렇게 최 선생 자실 것을 사 가지고 가는 길이야." 하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정임의 눈과 입과 목에서 그의 병과 마음을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중병을 앓은 깐 해서는 한 달 전 남대문서 볼 때보다 얼마 더 초췌한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네에." 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경알에는 이슬이 맺혔다. "선생님 댁은 다 안녕하셔요?" "응, 내가 떠날 때에는 괜찮았어." "최 선생님 댁도?" "응." "선생님 퍽은 애를 쓰셨어요." 하고 정임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웃는다. 말을 모르는 노파는 우리가 하는 말을 눈치나 채려는 듯이 멀거니 보고 있다가 서투른 영어로, "아직 미스 남은 신열이 있답니다. 그래도 가 본다고, 죽어도 가 본다고 내 말을 안 듣고 따라왔지요." 하고 정임에게 애정 있는 눈흘김을 주며, "유 노티 차일드(말썽꾼이)." 하고 입을 씰룩하며 정임을 안경 위로 본다. "니체워, 마뚜슈까(괜찮아요, 어머니)." 하고 정임은 노파를 보고 웃었다. 정임의 서양 사람에게 대한 행동은 서양식으로 째었다고 생각하였다. 정임은 도리어 유쾌한 빛을 보였다. 다만 그의 붉은빛 띤 눈과 마른 입술이 그의 몸에 열이 있음을 보였다. 나는 그의 손끝과 발끝이 싸늘하게 얼었을 것을 상상하였다. 마침 이 날은 날이 온화하였다. 엷은 햇빛도 오늘은 두꺼워진 듯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F역에서 내려서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산으로 향하였다. 산도 아니지마는 산 있는 나라에서 살던 우리는 최석이가 사는 곳을 산이라고 부르는 습관을 지었다. 삼림이 있으니 산같이 생각된 까닭이었다. 노파가 오른편 끝에 앉고, 가운데다가 정임을 앉히고 왼편 끝에 내가 앉았다. 쩟쩟쩟 하는 소리에 말은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 필은 키 큰 말이요, 한 필은 키가 작은 말인데 키 큰 말은 아마 늙은 군마 퇴물인가 싶게 허우대는 좋으나 몸이 여위고 털에는 윤이 없었다. 조금만 올라가는 길이 되어도 고개를 숙이고 애를 썼다. 작은 말은 까불어서 가끔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아이 삼림이 좋아요." 하고 정임은 정말 기쁜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좋아?" 하고 나는 멋없이 대꾸하고 나서, 후회되는 듯이, "밤낮 삼림 속에서만 사니까 지루한데." 하는 말을 붙였다. "저는 저 눈 있는 삼림 속으로 한정 없이 가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인제 기운이 없으니깐 웬걸 그래 보겠어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소릴 해. 인제 나을걸." 하고 나는 정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슬픈 눈물 방울이나 찾으려는 듯이. "제가 지금도 열이 삼십팔 도가 넘습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니까 아마 더 올라가나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야 못 살라고요. 오늘 하루만 살면 괜찮아요. 최 선생님만 한 번 뵙고 죽으면 괜찮아요." "왜 그런 소릴 해?" 하고 나는 책망하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정임은 기침을 시작하였다. 한바탕 기침을 하고는 기운이 진한 듯이 노파에게 기대며 조선말로, "추워요." 하였다. 이 여행이 어떻게 정임의 병에 좋지 못할 것은 의사가 아닌 나로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로는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외투를 벗어서 정임에게 입혀 주고 노파는 정임을 안아서 몸이 덜 흔들리도록 또 춥지 않도록 하였다. 나는 정임의 모양을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얼마를 지나서 정임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일어나며, "인제 몸이 좀 녹았습니다. 선생님 추우시겠어요. 이 외투 입으셔요." 하고 그의 입만 웃는 웃음을 웃었다. "난 춥지 않아. 어서 입고 있어." 하고 나는 정임이가 외투를 벗는 것을 막았다. 정임은 더 고집하려고도 아니하고, "선생님 시베리아의 삼림은 참 좋아요. 눈 덮인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이 인적 없고 자유로운 삼림 속으로 헤매어 보고 싶어요." 하고 아까 하던 것과 같은 말을 또 하였다. "며칠 잘 정양하여서, 날이나 따뜻하거든 한 번 산보나 해 보지." 하고 나는 정임의 말 뜻이 다른 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부러 평범하게 대답하였다. 정임은 대답이 없었다. "여기서도 아직 멀어요?" 하고 정임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심히 괴로워하는 모양으로 두 손을 자리에 짚어 몸을 버티면서 말하였다. "고대야, 최 선생이 반가워할 터이지. 오죽이나 반갑겠나." 하고 나는 정임을 위로하는 뜻으로 말하였다. "아이 참 미안해요. 제가 죄인이야요. 저 때문에 애매한 누명을 쓰시고 저렇게 사업도 버리시고 병환까지 나시니 저는 어떡허면 이 죄를 씻습니까?" 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정임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정임과 최석을 이 자유로운 시베리아의 삼림 속에 단둘이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석은 살아나가겠지마는 정임이가 살아날 수가 있을까, 하고 나는 정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숨은 실낱 같은 것 같았다. 바람받이에 놓인 등잔불과만 같은 것 같았다.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번 대하겠다는 것밖에 아무 소원이 없는 정임은 참으로 가엾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염려 말어. 무슨 걱정이야? 최 선생도 병이 돌리고 정임도 인제 얼마 정양하면 나을 것 아닌가. 아무 염려 말아요." 하고 나는 더욱 최석과 정임과 두 사람의 사랑을 달하게 할 결심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이 가엾은 간절한 두 사람의 마음을 가슴 미어지게 아니 생각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주의 모든 일 중에 정임의 정경보다 더 슬프고 불쌍한 정경이 또 있을까 하였다. 차디찬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의 광야에 병든 정임의 사랑으로 타는 불똥과 같이 날아가는 이 정경은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 비극인 것 같았다. 정임은 지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가끔 고개를 들어서는 기운 나는 양을 보이려고, 유쾌한 양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저 나무 보셔요. 오백 년은 살았겠지요?" 이런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또 기운이 지쳐서는 고개를 숙이고, 혹은 노파의 어깨에 혹은 내 어깨에 쓰러졌다. 마침내 우리가 향하고 가는 움집이 보였다. "정임이, 저기야." 하고 나는 움집을 가리켰다. "네에?" 하고 정임은 내 손가락 가는 곳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 저것 말야. 저기 저 고작 큰 전나무 두 개가 있지 않아? 그 사이로 보이는 저, 저거 말야. 옳지 옳지, 순임이 지금 나오지 않아?" 하였다. 순임이가 무엇을 가지러 나오는지 문을 열고 나와서는 밥 짓느라고 지어 놓은 이를테면 부엌에를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이 쪽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발견하였는지 몇 걸음 빨리 오다가는 서서 보고 오다가는 서서 보더니 내가 모자를 내두르는 것을 보고야 우리 일행인 것을 확실히 알고 달음박질을 쳐서 나온다. 우리 썰매를 만나자, "정임이야? 어쩌면 이 추운데." 하고 순임은 정임을 안고 그 안경으로 정임의 눈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앓으면서 이렇게 와?" 하고 순임은 노파와 나를 책망하는 듯이 돌아보았다. "아버지 어떠시냐?" 하고 나는 짐을 들고 앞서서 오면서 뒤따르는 순임에게 물었다. "아버지요?" 하고 순임은 어른에게 대한 경의를 표하노라고 내 곁에 와서 걸으며, "아버지께서 오늘은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순임이가 고생하는구나 고맙다, 이런 말씀도 하시고, 지금 같아서는 일어날 것도 같은데 기운이 없어서, 이런 말씀도 하시고, 또 선생님이 이르쿠츠크에를 들어가셨으니 무엇을 사 오실 듯싶으냐, 알아맞혀 보아라, 이런 농담도 하시고, 정임이가 어떤가 한 번 보았으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또 순임아, 내가 죽더라도 정임을 네 친동생으로 알아서 부디 잘 사랑해 주어라, 정임은 불쌍한 애다, 참 정임은 불쌍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그렇게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하시더니, 순임아 내가 죽거든 선생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지도를 받아라, 그러시길래 제가 아버지 안 돌아가셔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웃으시면서, 죽지 말까, 하시고는 어째 가슴이 좀 거북한가, 하시더니 잠이 드셨어요.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온." 집 앞에 거의 다 가서는 순임은 정임의 팔을 꼈던 것을 놓고 빨리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치마폭을 펄럭거리고 뛰는 양에는 어렸을 적 말괄량이 순임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나는 혼자 웃었다. 순임은 정임이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한 시각이라도 빨리 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주무시우? 정임이가 왔어요. 정임이가 왔습니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나도 방에 들어서고, 정임도 뒤따라 들어서고, 노파는 부엌으로 물건을 두러 들어갔다. 방은 절벽같이 어두웠다. "순임아, 불을 좀 켜려무나." 하고 최석의 얼굴을 찾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이며, "자나? 정임이가 왔네." 하고 불렀다. 정임도 곁에 와서 선다. 최석은 대답이 없었다. 순임이가 촛불을 켜자 최석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여보게, 여봐. 자나?" 하고 나는 무서운 예감을 가지면서 최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마는 최석은 시체라 하는 것을 나는 내 손을 통해서 깨달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이불을 벗기고 최석의 팔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거기는 맥이 없었다. 나는 최석의 자리옷 가슴을 헤치고 귀를 가슴에 대었다. 그 살은 얼음과 같이 차고 그 가슴은 고요하였다. 심장은 뛰기를 그친 것이었다. 나는 최석의 가슴에서 귀를 떼고 일어서면서,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네 손으로 눈이나 감겨 드려라." 하였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하고 정임은 전연히 절제할 힘을 잃어버린 듯이 최석의 가슴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순임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최석의 베개 곁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아라사 노파도 울었다. 방 안에는 오직 울음 소리뿐이요, 말이 없었다. 최석은 벌써 이 슬픈 광경도 몰라보는 사람이었다. 최석이가 자기의 싸움을 이기고 죽었는지, 또는 끝까지 지다가 죽었는지 그것은 영원한 비밀이어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순간에 그의 의식기에 떠오르던 오직 하나가 정임이었으리라는 것만은. 지금 정임이가 그의 가슴에 엎어져 울지마는, 정임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건마는 최석의 가슴은 뛸 줄을 모른다. 이것이 죽음이란 것이다. 뒤에 경찰의가 와서 검사한 결과에 의하면, 최석은 폐렴으로 앓던 결과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최석의 장례를 끝내고 순임과 정임을 데리고 오려 하였으나 정임은 듣지 아니하고 노파와 같이 바이칼 촌으로 가 버렸다. 그런 뒤로는 정임에게서는 일체 음신이 없다. 때때로 노파에게서 편지가 오는데 정임은 최석이가 있던 방에 가만히 있다고만 하였다. 서투른 영어가 뜻을 충분히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임에게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라는 편지도 하고 돈이 필요하거든 청구하라는 편지도 하나 영 답장이 없다. 만일 정임이가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나는 한 번 더 시베리아에 가서 둘을 가지런히 묻고 `두 별 무덤'이라는 비를 세워 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조선으로 오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최석과 정임에게 대한 이 기록을 믿고 그 두 사람에게 대한 오해를 풀라. EOT; }